오늘 저녁거리를 마련하려 배를 띄운 지 한나절이 지났건만, 그 흔하던 날치 한 마리 뵈지 않는다.
조금만 더 나가보자 하던 것이 햇볕이 전하는 피로에 그만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어느새 망망대해. 쌀통 위 쌀벌레 한 마리 마냥 너른 바다 위에 조그만 돛단배 한 대가 떠있다.
잠이 깬 소년은 뱃머리에 올라서서, 걱정은 잠깐 제쳐두고 다시없을지 모를 이 광활한 자유를 만끽해 보기로 한다. 한 팔로 돛대를 잡고 나머지 한 팔은 옆으로 쫙 뻗어 바람을 느낀다. 살짝 등을 뒤로 젖혀 바람을 침대 삼아 누워본다. 목선을 타고 등짝까지 들어온 바닷바람이 옷을 부풀려 날개를 만든다.
‘이 날을 잊지 못할 것 같아. 살구빛 태양은 적당히 따스하고 포근해. 눈을 감아도 온 세상이 살구 빛이야.
파도도 잔잔해서 엄마 등 뒤에 업혀있는 것만 같아. 귓가에 엄마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복숭아 같은 엄마 냄새가 기억을 타고 코 끝을 스친다.’
소년은 눈을 감은 채 엄마의 얼굴을 눈앞에 그려본다. 구름같이 보드라운 엄마의 살결에 얼굴을 부비 부비.
‘어, 이 느낌은... 혼자가 아닌 듯한. 어, 무슨 소리지?’
고요한 바다에 있어 본 사람은 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작은 움직임과 소리까지도 아주 잘 느껴진다는 것을. 소년은 눈을 뜬다.
저만치 아까 없던 까만 언덕이 보인다. 햇볕이 부서져 짙푸른 물결이 은빛 비늘을 입은 지 오래인데,
저 까만 언덕은 언제 나타난 걸까?
어, 어, 어!!!!
까만 언덕이 점점 높아진다. 언덕이 솟아오른다.
푸~~ 와~~ 철퍽 철퍼덕 억!!! 촤악~~~
언덕이 솟아오르자 순식간에 거대한 그림자가 바다를 밤으로 만들어버렸다.
소년은 돛 대를 두 팔로 꽉 껴안은 채 쭈그려 앉아 몸을 낮춘다.
쏴~ 쏴~~~~ 솟아오르는 물기둥.
고래다!!!!!!! 커다란 흰 수염 고래.
소년은 얼른 뛰어가 키를 돌린다. 배의 방향을 돌려 고래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리고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본다. 작살을 집어 든다. 배를 천천히 뱅뱅 도는 고래를 향해 소리친다.
“저리 가! 가까이 오기만 해 봐! 우~~ 우~~ 내 배를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을 테야!”
소년은 두려웠다. 두려움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소년은 두려움 자체가 되어 버렸다.
불 덩어리처럼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공격과 방어 태세를 반복했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열기로 으르렁거렸다. 작은 몸집의 소년이 고래를 상대하려면 소년은 고래가 되어야 했다. 몸집이 고래만 해질 수 없는 소년은 생각 속에서 자신을 고래로 키웠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소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표정을 하고 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졌다. 작살로 고래를 찌르기에는 손이 바들바들 떨려 명중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던져지는 물건이 닿는 곳, 소년의 큰 소리가 닿는 곳이 몽땅 소년의 영역이라는 듯이 어마어마하게
우~~ 왕~~~~ 저 끝까지 다 내 것이라는 듯이 소리를 쳤다. 소년은 진짜 고래가 된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났는데, 고래가 물 밖으로 눈만 빼꼼 내밀고 물속에 멈춰 있는 것 같다.
소년은 그제야 흥분을 조금 가라앉힌다.
소년의 몸집만 한 고래의 눈이 껌뻑거린다. 어쩐지 그 눈이 젖어있는 것만 같다.
소년은 보았다. 고래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고래는 이내 몸을 돌려 배 반대 방향 바다로 헤엄쳐 간다. 고래를 바라보던소년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생각한다.
‘미안해, 고래야.
내가 나인 것처럼 너는 그냥 너인데.
내가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 것처럼 넌 큰 입을 벌려 밥을 먹는 것뿐인데, 너를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했어.
내가 안녕하고 손짓하는 것처럼 너는 큰 지느러미를 흔들었던 거구나. 너는 밥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니구나.
내가 숨을 쉬는 것처럼 너도 숨을 쉬려고 물기둥을 쏘아 올린 것이었구나.
나처럼 너도, 살려고 그랬던 거구나.
미안해, 고래야. 너의 슬픈 눈을 너무 늦게 봐서.
미안해, 고래야. 너의 눈물을 너무 늦게 봐서.
모두 무서워하니까 가까이 오지도 못 하는 너를 무서워해서.
너는 지나가는 것뿐인데, 너를 무서워하고 너에게 화를 내서 미안해.
네가 큰 몸집으로 움직이는 소리가 너무 커서 너의 흐느낌을 들을 수가 없었어.
내 눈에 보이는 대로만 보고, 내 귀에 들리는 대로만 들었어. 진짜 너를 보지 못해서 참 미안해.’
소년은 멀어져 가는 고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래를 위한 노래를 부른다.
물결을 타고 소년의 노래가 고래에게 닿은 것일까.
저만치 가던 고래가 높이 솟아올랐다 내려가고, 다시 한번 더 높이 솟아올랐다 내려간다.
‘고래야, 잘 가.’
소년은 고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고래를 쫓아오던 것이었을까. 뱃고동 소리가 들리고 철제어선 한 척이 모습을 드러낸다.
철제어선은 소년의 배를 발견해 다가오고, 소년은 수평선 가까이 가고 있는 고래를 말없이 바라보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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