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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성 Aug 15. 2023

나만의 개학

다시 기지개를 켜고

이제는 나의 방학을 끝내야 할 것 같다.

지난겨울 아이들의 방학이 시작되며 글을 쓰지 못했다.  쓰지 못한 건지 쓰지 않은 건지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이 고민해 봐야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쓰지 않았다고 하자니 심적, 상황적 여유가 없었던 것은 사실이니 조금 억울하고, 쓰지 못했다고 하기에는 변명을 늘어놓는 내가 어쩐지 비겁하게 느껴져 둘 다 마음에 차지 않는다.


그냥 쓸 수 없었다고 해두자. 못했다 안했다에서 면치 못할 내면의 변명과 책임 공방이 시끄럽기 전에.

쓸 수 없었다는 말로 과거를 수용하기로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 가지 연습하고 있는 것이 있다. 수용.


바깥 세계를 수용하는 일이 참 힘이 들지만, 내게 더 어려운 것은 나를 수용하는 일이었다.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내 의견은 무엇인지, 내 감정이 어떠한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 마땅히 해야 한다고 요구되는 것들을 본능적으로 캐치하는 능력이 향상되어 온 반면 나의 마음 감각은 희미해져 온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내 감정이 어떤지, 내 욕구는 무엇인지,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하고는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 감정과 생각과 욕구는 딴청을 피운다. 골치 아픈 건 집어치우고 초콜릿이나 먹자 한다. 초콜릿 상자에 손을 집어넣어 잡히는 대로 그 일에 내달린다. 그게 사는 건 줄 알고 살다 보니 속이 텅 빈 갈대가 되어 바람이 불면 휘청휘청거리고, 마음속 빈 공간을 지나치는 바람이 슝슝 소리를 내 끝내는 이렇게 읊조리는 것이다. "마음이 공허해..."


마음을 바라보는 것도, 느끼는 것도 모두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느끼는 것이 그대로 수용되는 멍석이 많이 깔릴수록 춤사위는 커지고 반경도 넓어진다. 그렇게 자신에게 허용된 장의 크기만큼 자유를 느끼고, 그 안전지대에서 느끼고 표현하는 연습을 한다. 부익부 빈인빈의 슬픈 전개도는 마음의 영역에도 해당되어, 안전지대의 반경과 마음 챙김 정도는 정비례하게 되는 것 같다.

수용의 영역, 공감의 영역을 확장해 가는 것이 진짜 내가 딛고 서야 할 진정한 땅일 것이다. 萬事가 人事이고 人事가 心事이니, 세상만사가 결국 마음에서 일어나니 그 땅이 진짜 내 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는 게 나의 과거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나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뭐 이제 다시 글을 써보겠다는 얘기가 이렇게 구구절절 길어졌다.

브런치 프로필에 보니 직업과 관심분야의 카테고리를 정하는 란이 있다. 하나하나 바라보며 드래그를 하다 보니, 그 많고 많은 영역에 내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 희미한 마음 감각만큼이나 희미한 나의 정체성을 명징하게 일깨운다. 엽렵하지는 못해도 영절스럽게 잘 살아온 듯하나 두 발 딛고 설 내 땅을 만들지 못했다. 보여지는 치레 말고 내면의 레이더망을 감지하며 수굿하게 뚜벅뚜벅 나머지 길을 가보려 한다. 주부, 시인 뭐 이런 내 것 같지 않은 카테고리를 선택해제했다. 나를 뭐라 정의하게 될지 모르겠으나 일단 가보는 거지 뭐.


혼돈과 아리송이 한 가득이라 재료가 잔뜩인데 해먹 지를 못하고 있는 상황을 글쓰기를 통해 정렬해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여 나의 레시피들을 발견하고 화려하지는 않아도 소담스러운 한 상 차려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아이들의 겨울 방학은 이미 끝나고 한 학기가 더 지나 여름 방학까지 지나갔다. 이제야 나는 이렇게 기지개를 켜본다.




#글쓰기 #마음 #자기 수용 #공감 #마음 챙김

#다시 시작 #라라크루 #개학 #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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