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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조 Jun 20. 2019

[단편] 목소리

습작

**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예전에 썼던 습작이에요.

공간이 공간인지라 망설이다가 잠깐 틈내어 올려봅니다.











성큼성큼 걸어온 남자가 까만 신형 소나타 안으로 긴 다리부터 접어 넣은 뒤 차 문을 닫는다. 선탠이 진하지 않아 차 안은 훤히 들여다보인다. 조수석에 멀거니 앉은 여자는 제 얼굴을 네모난 파운데이션으로 다독이기도 하고, 거울을 꺼내 앞머리를 정리하기도 하다가 차 문이 열리자 재빨리 가방을 열어 그것들을 집어넣는다. 여자의 머리는 밝은 갈색에 고개를 숙일 때마다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였다.




나는 유리창으로 그들을 지켜본다. 희끄무레한 거품이 얇게 층을 만들고 있어 커피가 보이지 않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하필 회색 카디건을 입고 와서 꼭 외로운 비둘기가 된 기분이다. 괜히 입고 왔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끔 곁눈질로 유리 너머에 있는 그들을 살핀다. 그가 왼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몸을 천천히 기울이는 것이 보였다. 아마 저 차 안에는 무겁거나, 혹은 아주 가벼운 공기가 감돌고 있겠지. 나는 턱을 괴고 생각한다. 저 둘… 연인일까. 남자가 몸을 틀어 둘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여자가 몸을 뒤로 젖히는 시늉을 했지만 둘은 결국 입맞춤을 했다. 잠시 뒤 여자가 손을 허공을 향해 이리저리 움직였다. 남자는 크게 웃어대는 것 같았다. 재미난 이야기라도 하는 듯 그들은 소리가 없는 웃음을 지었다. 수화를 하는 것처럼 여자는 왼손으로 주먹을 쥐고 자신의 손바닥을 두드리기도 하고, 검지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어떤 것을 설명하려고도 했다. 남자가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웃는 모습은 신중하지만 짓궂게도 보인다. 이내 그들은 손을 어깨로 뻗어 안전벨트를 맸다.




나는 이제 저들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연인, 맞구나. 떠드는 소리가 낮아지고 카페 안의 음악소리도 잦아든다. 손으로 잔을 쥐어봤다. 귀에서 삐, 하고 불투명한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또 이러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등에 오도도, 하고 소름이 돋는 것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여자 귀엽게 생겼네.’


스쳐가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턱 하고 숨통이 막힌다. 나는 눈물이 흐를 때까지 기침을 하다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빠르게 문지르면서 몸을 기울이고 이리저리 주위를 살폈다. 보통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차갑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에 결국 의자 끄는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섰다. 몇 없는 카페 안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로 모인다.


‘저 남자랑 퍽 잘 어울린다.’


그러자 목소리는 다시 여러 갈래의 바람처럼 빠르게 흩어진다. 여기저기서 바람같이 귓전을 스치고 들어온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목소리에 나는 빈틈을 내어 준 기분이었다.


“어디 있어?”


나는 기어코 그 말을 뱉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아까부터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둘이 나를 흘끔흘끔 살피며 속닥거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그 목소리에 대답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믿고 싶은 그 목소리. 나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힘겹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니까, 나 이제 환청까지 들리는 거네. 말캉한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며 얇고 딱딱한 커피용 빨대로 거품을 휘휘 저어낸다. 왼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문질러 닦으며 그래, 하고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땀이 계속해서 흘렀다.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나는 다시 천천히 생각한다. 그래. 정말로 여기에 네가 있다면. 네가 내게 말을 걸었다고 하면. 내가, 저 차 안에서, 둘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하고 네게 묻는다면. 어쨌거나, 좋아 보이지 않냐, 하고 너는 한쪽 눈썹을 찡그리겠지. 




나는 머그잔에 떨리는 입을 겨우 맞추었다. 그리고 그 뜨거운 커피를 한 번에 목구멍 뒤로 넘기고 말았다. 혀에서 식도까지 덩어리째 뭉개지는 것 같은 아픔에 미간을 좁혔다. 아, 뜨거워. 뜨뜻한 눈물이 고인 눈으로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카운터에 서서 무언가를 적고 있던 빨간 머리의 젊은 주인 여자와 눈이 마주친다. 그녀가 나의 눈을 피해 재빨리 고개를 숙인다. 왠지 분한 마음이 들어 입을 꽉 닫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더럽게 안 식네.’


반쯤 남은 커피가 담긴 잔을 맞은편 쪽으로 밀어버린다. 될 대로 되라지. 긴장 때문에 발이 저렸지만 일어선다. 이번에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처럼 당당하게 문을 향해 걸었다. 그들의 따가운 시선이 나를 따라온다. 최대한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왼쪽 어깨로 문을 밀자 도금을 한 자그마한 종이 딸랑거리고 바람이 날아와 코와 뺨을 스쳤다. 연인의 차가 머물렀던 차갑고 까만 아스팔트에는 큰 플라타너스 잎이 마구 떨어지고 있었다. 




겨울이 온 사방에서 마구 바람을 토해내기에 반 팔 티에 걸친 카디건만 입고 걷기는 추웠다. 옷자락이 펄럭이고 눈알이 쓰라렸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내가 묻는다. 어디 있어. 너는 답이 없다. 아까 그 둘 말인데, 연인일까? 결혼을 하고도 일평생 아끼면서 살 만큼 사랑하고 있을까? 더 이상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너는 이제, 없다. 아무 곳에서도 너를 찾을 수 없다. 그 어디에서도. 결국 나는 눈가를 손바닥으로 세게 문지르며 발걸음을 돌린다. 부러 동네를 한 바퀴 돌고 경찰서, 소방서, 마리 미용실, 스파게티 하우스, 공주 액세서리. 하나 같이 네가 유치한 이름뿐 이라던 우리 동네의 간판들을 지나친다. 그리고… 우리 둘의 학교까지 지나서야 나는 겨우 집의 존재를 떠올렸다. 수많은 것을 떠올리며 걷는다. 정신없이 허공 속으로 부서지는 입김을 내뱉으며 사람들을 사이를 헤쳐 나갔다. 검은 개를 데리고 지나가는 흰 운동복 차림의 사내. 바삐 걸어가는 짧은 치마의 여대생. 그들을 묵묵히 지나친다.




걸어가면서, 전봇대를 휘감은 식물을 본다. 이리저리 얽혀서는 위로 뻗어나가는 덩굴. 천천히 잔상이 떠오른다. 과거, 때로는 너무 일찍 지나쳐버린 시간들. 우리는 등나무가 위로 우거진 교정 벤치에 마주 보고 앉아 있다. 교복 치마가 슬쩍슬쩍 바람에 부풀어 오르고 개의치 않는 너의 모습과 달리 나는 계속해서 펄럭거리는 치맛자락을 손바닥으로 내리친다. 자,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 줄 거야? 네가 묻는다. 오늘은… 시. 네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시? 어떤 거?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것이다…


… 음. 좀 더 가벼운 시는 없어? 이게… 무거운 내용인가. 외롭다는 게, 가벼운 건 아니야. … 그런가. 여하튼… 나는 이 시 좋아. 왜? 그냥. 좋으니까. … 그래. 진짜 좋으면 이유가 없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너는 웃는다. 색깔을 가진 너의 웃음 뒤에는 너른 햇살이 펼쳐지고 잔상은 눈앞에서 그렇게 사라진다. 따뜻한 햇살 속에서 창창하게 퍼지는 너의 웃음을 끝으로. 기억의 화면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나의 시야로 목도리를 칭칭 감은 채 콘 아이스크림을 들고 뛰어오는 여자아이가 가까워진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물러났을 때에는, 그 애가 흘끗 나를 보고 지나쳐 간 뒤였다. 멍한 눈으로 뛰어가는 아이를 쫓다가 땅을 향해 시선을 꽂고 계속해서 걷는다.




내가 시선을 꽂고 있는 운동화 위로 또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멀리서 타오르는 노을이 너의 옆으로 비껴간다. 노을은 너를 통과하지 못하고 철조망 위로 그리고 불퉁한 돌들이 드문드문 박힌 시멘트 길 위로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걷는다. 나는 너의 뒤를 따라. 너는 나보다 조금 앞서. 흰 교복을 입은 너의 모습은, 희고, 또 어쩌면 노을처럼 붉기도 하다. 어, 하고 바람의 흐름이 조금 달라졌음을 느끼는 순간 다리 밑으로 시끄럽게 기차가 지나간다. 




나는 잠시간 굳게 입을 닫는다. 의식처럼 이 시간에 벌어지는 일이다. 나는 기도하듯 잠깐 눈을 감는다. 요란한 소리가 천천히 멀어져 가는 것이 꼭 꿈만 같다. 나는 너를 앞서겠다고 결심한 뒤 너를 비껴가 스프링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바람이 시원하게 얼굴과 머리칼을 스친다. 나는 이제 뒷짐을 지고 너를 바라보며 뒤로 총총히 걷는다. 네가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뜬다. 조금 위태로운 걸음이지만 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서 양팔을 이리저리 옆으로 휘저으며 말한다. 날 좀 봐, 노을 때문에 온통 피로 물든 것 같아. 너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어 보인다. 너의 버릇이다. 피 칠갑 같은 소리 하네. 너, 내가 눈알 터지는 잔인한 영화 좀 그만 보랬지.




기억이 또다시 흩어진다. 바람이 눈앞으로 모래를 끌어왔고 눈이 따가워 눈물을 떨어뜨리며 그렇게 다시 너의 모습을 놓쳐버린다. 정처 없이 걸었건만 어느새 익숙한 아파트들이 불쑥불쑥 들어서 있음에 놀란다. 시내만큼이나 사람이 복닥거리는 아파트 단지를 마주하자,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저기 어딘가에 내 집도 콕 박혀있겠지. 창문들을 바라보며 걷는다. 모두가 네모나고… 그러다 추위에 운동화 속에 갇힌 발이 저려온다. 몇 개의 계단을 무거운 무릎으로 올라서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손가락으로 짓이기자 15층. 14층, 13층… 하고 빨간 숫자들이 나타난다. 눈을 비비며 다시 숫자를 바라봤다. 숫자들이 뭉그러져 내 머리 위로 붉게 흘러내릴 것 같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네모난 칸에 홀린 듯 몸을 실었다. 한 층, 또 한 층. 허공으로 올라선다. 이 밑에 지옥이 있기를 바라지만, 갈 수 없겠지. 네가 그랬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죽자마자 지옥으로 굴러 떨어질 거라고. 아마, 나도 그럴 거다. 이 엘리베이터의 줄이 끊기면, 지하가 아니라 나락으로 추락할 것이다. 나도. 그러나 그곳에도 없을 것이다. 너는.




지옥은, 또 다른 세계라는 곳은 그렇게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 너처럼 전차를 온몸으로 부딪혀야만 갈 수 있을 거다. 그렇게 해서 정신이 뚝, 하고 하잘 것 없이 끊겨버리면 지옥과 천국 중에 선택할 수 있는 티켓 한 장이 머리 위로 볼 품 없이 떨어지고, 아마 너는 지옥을 택했을 거다. 안 봐도 뻔하지. 문이 열리고, 발을 뗀다. 온몸이 저려오는 것 같다. 뒤를 돌아보았다. 엘리베이터가 누군가를 싣기 위하여 저승사자처럼 다시 1층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내 발소리가 복도를 넘어 뻥 뚫린 허공으로 흩어졌다. 눈앞이 망연했다. 




12968. 해제되었습니다.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심호흡을 한다. 손잡이를 쥐고 살짝은 얼어버린 손으로 문을 열자 훈훈한 온도가 얼굴에 닿았다. 신발 뒤축을 구기며 약간은 땀이 배어있는 발을 빼내고 거실에 있는 소파를 향해 걸어가며 카디건을 벗는다. 고개를 돌렸을 때, 아이는 식탁 의자에 앉아 등을 돌린 채 꾸역꾸역 학을 접고 있었다. 말없이 베란다 문을 열었다. 아까까지 맞으며 걸어온 것과 똑같은 냄새를 가진 바람이 훅 하고 침범해 아무렇게나 나의 앞머리를 흩어 놓는다. 더 이상 바람에 깎인다면 내 몸은 부서지고 무너질 것 같았다.




나는 아이가 있는 식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걸어가는 맨발이 바닥에 붙었다가 떨어지며 찌걱찌걱 소리를 내지만 너는 돌아보지 않는다. 열어놓은 문으로 바람은 계속해서 들어온다. 아이들이 아파트 단지 속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까지도 멀리서부터 들려온다. 나는 아이의 맞은편에 선다. 유리 위에 놓인 빨간 색종이를 꾹꾹 누르고 손톱으로 할퀴어 접는 아이의 손을 응시하다가, 성아, 하고 작게 불렀다. 내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지자 아이는 조금 움찔했지만, 다시 학의 빨간 날개를 고집스럽게 늘려 펼칠 뿐 대답하지 않는다.


“오늘은 왜 민준이랑 안 놀았어?”


아이는 대답이 없다. 꼭 아까의 그 목소리처럼. 내가 계속 기다리고 서 있자 결국 아이는 조그만 고개를 들어 나를 살핀다. 나는 화장실로 달려가 모든 것을 게워내고 싶은 생각을 누르면서 힘겹게 너를 바라본다. 아이는 학을 쥐고 조그맣게 씩씩거린다. 그런 너를 보다가 찌르르한 두통이 찾아와 괴로워진다. 나는 이마를 짚으며 작은 곽에서 우악스럽게 휴지를 뽑는다. 상자가 이리저리 들썩이며 푹푹, 휴지가 끌려 나온다. 아이가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는 것이 느껴져 나는 눈을 감아버린다. 대답을 포기했다는 뜻으로 내가 휴지 몇 장을 내밀자 아이는 학을 내려놓고 휴지를 코에 갖다 댄다. 아이가 두 눈을 꽉 감는 데까지는 시간이 아주 느리게 지나고, 아이의 코가 몇 차례 콧물을 토하는 소리에 다시 빠르게 흘러간다. 소리는 우리 위를 떠다니며 잠깐 맴돌다 사라져 간다. 나는 휴지로 두어 번 아이의 코를 문질렀다. 코 푼 휴지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짠 내가 난다. 비린내와 짠 내는 역겹다. 이 둘은 온 신경을 뒤틀리게 한다. 그 날을 자꾸 떠올리게 한다.


“김민준은 오늘 엄마랑 수영장 갔다고.”


아이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휴지를 가리킨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아이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이거, 누나가 치워. 나는 반사적으로 멍한 표정을 띠운 채 휴지를 집어 들어 바닥에 던져 버렸다. 아이의 눈이 커다래진다.


“자, 치웠어” 


나는 눈을 깜빡이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아이는 그런 내 반응에 입을 꾹 다물고 다시 종이 접기에 열중하려 한다. 그러나 눈물방울이 그렁하게 달려있는 채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렇게 심술을 부릴 때의 아이는,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 고집스럽고, 또 묵묵한 입술을 가진 그. 나는 유성아, 하고 목소리를 터뜨렸다. 내 것이겠지. 이 목소리는 내 것이 분명하겠지. 손을 뻗어 너의 정수리를 쓰다듬자 손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머리카락들이 부서질 것만 같이 부드럽다. 너는, 아직도 이렇게나 작구나. 아까 바람을 맞아 메말라버린 뺨 위로 눈물이 주룩, 볼 품 없이 흐르지만 웃어 보였다.


“이 누나보다 예쁘구나, 이유성!”

그러나 기어코 터지는 너의 울음.

“누나… 정말로 엄마가 집을 나갔어?”


내가 언제부터 울면서 웃을 수 있었더라. 옛날에는 남이 울 때 나도 같이 울었던 것 같은데. 그때 내가 울었던 이유는, 내가 무기력했기 때문이 아니었어. 그냥, 울고 싶었기 때문이야. 사실 나는 아직도 무기력함이 뭔지 잘 모르겠어. 사실 그런 건, 영영 모르고 싶은데.




네 앞에서, 눈물 줄기가 갈라지는 얼굴을 하고 나는 서 있다. 웃으려고 노력했던 근육은 보기 좋게 일그러지기만 했으리라. 창 밖에서 무리에서 떨어진 새소리가 들려온다. 무리에서 떨어졌다고 짐작할 수 있는 건, 그 소리가 아주 외롭게 들려오기 때문에. 아이가 뱉은 문장은 우는 소리였을 뿐이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허벅지가 따갑게 아려온다. 아이는 이슬 맺힌 약한 풀포기처럼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나는 아이의 손을 이끌고 거실 중앙으로 걸어온다. 짧은 순간을 걸으면서 나는, 이 아픔과 아이의 눈물을 이 시간들 위에 남기어 둔 채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것처럼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랫입술을 깨문다. 지금 내 앞에는 눈물을 떨어뜨리는 아이가, 있는 힘껏 들썩이는 것만 같은 아이의 어깨가 있다.




나는 남몰래 슬퍼하는 게 익숙한 그 꼬마를 내 앞에 세워둔 채 무릎을 꿇어 고개를 들었다. 조그만 윗입술 언저리에 눈물이 달려있는 것이 보인다. 내 바지 위로도 이미 몇 방울이 떨어졌다. 네가 뱉어낸 것은 항상 내게 엄청난 파장을 가져다주었지. 네 눈물, 미소, 너의 문장. 모든 게.




엄마, 아빠, 그다음, 누나. 네가 그렇게 나를 부르며 통통한 볼에 한가득 미소를 품고 내게 안길 때, 나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아이에게 장난스럽게 낄낄 어린 웃음을 웃어 보이곤 했다. 아이가 바닥에 누워 꼼지락댈 때부터 쑥쑥 자라 유치원에 입학할 때까지. 마음 한 구석에 작은 추가 이리저리 진자운동을 하듯 책임감이 생겨났다. 그러나 지금의 나, 얘야 그런 말은 또 어디에서 들었어, 하고 윽박을 질러버리고만 싶다. 이마를 짚으며 아이를 바라본다. 차라리 엄마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주었으면. 온몸이 화끈거리고 뱃속이 부글거리는 이 느낌. 나의 엄지손가락이 너의 눈가를 문질러 닦는다. 홀연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말랑한 살결.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서로의 살덩이와 뼈, 그리고 가죽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한갓될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나는 아이에게 묻고 싶어 진다. 유성아. 너, 정말로…




서러운 기분으로 너의 볼록한 배에 눈가를 묻으며 아이를 껴안는다. 결국 나는 눈물을 터뜨려 아이의 옷을 축축하게 적신다. 아이가 앉아있던 식탁이 뿌옇게 흐려져 보인다. 저 너머 식탁에는 색색의 학들이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넘어져 있을 것이다. 유치원에 입학한 후로 줄곧 접어온 아이의 친구들. 어느 순간 아이의 방에서 한 마리씩 그 개수가 더해지곤 했던. 그중에는 날개가 찢어지고 머리통이 비정상적으로 큰 것도 있다. 언제나 날고 싶은 아이와 그것을 대신하기라도 하듯 날개를 가진 아이의 친구들. 아이는 조그만 손으로 내 어깨를 밀더니 나와 눈을 맞춘다. 그리고 접다 만 학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때가 된다면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갈 수 있는 것.




그러나 나는 가슴이 뜨거워질 뿐, 이것을 영원히 받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잠자코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어 보였다. 방울방울 터뜨리던 눈물을 이제는 펑펑 쏟으며 내게 안기는 아이. 내 가슴팍에 전해지는 아이의 몸뚱어리가 울음에 힘을 입어 조금씩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내 손은 안달이 난 것처럼 그 작은 등을 빠르게 쓸어내린다. 퍼석거리는 입술을 깨물자 비릿하게 피 맛이 난다. 작은 몸뚱이가 토해내는 울음이 더욱 커진다. 아이의 주먹 쥔 손에서 날개 큰 파란 학이 뭉개진다. 내가 무릎을 꿇은 채 마주한 아이가 꼭… 천사 같이 느껴져 나는 두려워진다.


“다치지 않게 할 거야. 걱정 마.”

“… 누나를?”


아니. 네 친구들과 너. 나는 몸을 일으키며 너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아이를 들어 올린다. 저번보다 무거워졌네. 무슨 생각이 네 안에 잠들어 있을지 예측할 수 없어 무서웠던. 아이가 지금까지 유치원에서 그려 온 스케치북 속 온통 빨갛고 파란 세모들을 떠올리며 잠자코 아이의 등을 토닥였다.




줄곧 엄마를 찾아대던 아이가 잠이 들 때까지 나는 잠자코 아이를 안고 거실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그러면서 우리 둘의 미래는 지켜야 하는 것, 지키는 것. 그 외에는 다른 것이 끼어들 수 없다고 단정했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지켜줄게 성아. 가슴팍에 안겨 젖은 속눈썹을 내리깐 채 가만가만 숨을 뱉는 아이. 나는 땀으로 붙어있는 너의 앞머리를 떼어낸다. 간지러운지 잠든 네가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른다. 토닥거리기를 멈추고 너를 소파 위에 누인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베란다를 향해 걸어간다. 그네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계속해서 바람을 맞고 싶다. 가루가 되고 싶었다. 부슬부슬. 사람들은 멀리,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다. 베란다에 서서 멍청하니 나는 세상을 바라본다. 나무 옆. 벤치, 중년의 여자들은 아이들과 놀이터의 흙을 밟고 서 있으며 젊은 여인이 구두 소리를 내며 단지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의 정수리를 바라보다가 결국 문을 닫고 세게 커튼을 쳤다. 촤라락, 하고 소리가 뒤늦게 따라온다. 이만 잠들기로 한다. 아이의 옆에서. 눈을 감는 것이 두렵지만, 눈을 뜨고 있을 때 보다 아프지는 않을 것 같았다.




꿈을 꾼다. 




네가 떠난 이후로. 언제나 같은 꿈이다. 빨간 장갑을 줍는 꿈. 너의 장갑을. 그것이 또 거기에 있었다. 배경은 언제나 거실이다.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하다. 거실 중앙에 가지런히 포개어져 있는 빨간 장갑. 오후의 햇살이 베란다 현관을 통해 이마를 뜨겁게 달군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나는 걸어가 저번처럼 장갑을 주워 든다. 그리고 문득, 이 상황을 멈출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때 현관문이 열린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가 되어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한다. 체리, 네가 들어온다. 이번에는 끔찍할 만큼 활짝 웃는 표정이다. 너는 눈 안의 까만 동공을 잃어버렸고, 팔 한쪽을 잃었다. 너는 등 뒤로 남은 한쪽 팔을 뻗어 현관문을 닫고, 순식간에 머리통을 떼어내어 통째로 신발장 근처에 내려놓는다. 머리가 떨어져 나간 목에서 피는 흐르지 않는다. 머리를 떼어내고 목만 붙은 너의 육신이 나를 향해 걸어온다. 신발장에 놓인 너의 얼굴에서 입술이 열리지 않고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보고 싶었어.


나는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며 번쩍 눈을 뜬다. 얼마나 잤는지 알 수 없다. 티셔츠가 땀 때문에 등에 들러붙어 있다. 눈앞이 완연하게 어두워 숨이 막혔다. 그러다가 소파 위 아이의 숨소리가 먹먹한 귀 속으로 새어 들어왔을 때에야 겨우 자그마한 숨통이 터졌다.




꿈이야. 꿈. 몸을 일으켜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 간 눈물을 털어낸다. 어둠 속에서 물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무릎을 대고 거실을 가로질러 기어간다. 힘겹게 팔을 뻗어 몇 번의 시도 끝에 스위치를 짓이겼다. 깜빡이며 불이 들어온다. 나는 달려가 아이를 급하게 흔들어 깨운다. 눈을 비비며 깨어나는 아이를 보며 안심한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악몽을 꾸는 동안 천천히 생겨났을 까만 도시의 붉고 푸른 야경은 유리창에 가득했다. 그러나 형광등이, 불시에 그 어둠의 균열마저도 순식간에 삼켜버린다. 나는 아이가 눈을 비비는 동안 멍하게 창밖을 보며 너와의 다른 추억을 떠올렸다.




우리, 역에서 처음 만났었어. 기억해? 

식판 위로 숟가락을 가져다 대다 말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미역국 속의 북어가 유난히 누렇게 보였던 것은 착각일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는 학교 식당에 있었다. 너는 턱을 괴고 미간을 좁힌 채 웃고 있었다. 그 때라면, 그… 역에서의 일을 말하는 걸까.


뭐 해? 얼른 먹어. 네가 턱짓으로 나의 식판을 가리키며 아무렇지 않은 듯 수저를 집어 들었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너의 재촉에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너를 따라 수저를 집었었다. 급식실의 시끄러운 소리에 자그맣게 짤깍대는 수저 소리가 더해지고, 나는 말을 잃은 사람처럼 밥만 삼켰었다.




너를 만났었다. 꼭 이렇게 흐린 날에. 유성이를 할머니 댁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가던 오후. 바쁜 엄마를 원망하며 홀로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지겨워 한참이나 역 근처를 맴돌았었다. 역은 꽤 컸다. 그동안은 유성이를 데리러 가고, 오느라 바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지나치는 사람들을 헤치고, 쫓고, 방황하던 나의 눈.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많이 어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가만히 서서 눈알만 굴리며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 지겨워져 이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너를 보았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 약간은 짜증을 부리며 내 옆을 지나쳐 걸어가던 너. 




나는 너와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섰다. 길 위에 흔적 없는 발자국을 더하며 서성이던 나와 너. 조금의 거리가 있었지만 나는 너의 생김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따금 네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 때마다 찰랑이던 긴 밤색의 머리카락. 오뚝하고 높은 코. 까맣고 긴 속눈썹에 무엇보다 너는 입술이 붉었었다. 그래. 네 얼굴 말고, 네 운동화가 희다는 것만 기억했다면, 지금 조금이나마 덜 슬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퍼뜩 정신을 차린다. 수화기 너머로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유주야. 언니가 갈게. 나는 숨을 멈춘다. 이렇게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잊게 되어버리는 때가 잦아졌다. 묵묵하게 수화기를 두 손으로 감싸고 언니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입을 연다.


“언니, 나 요즘, 말을 하다가도 자꾸 과거가 떠올라.”

“그러니까 언니가 유성이 데리러 갈게… 너는 좀 쉬어.”

“….”

“유주야, 언니 말 듣고 있어?”

“…응."

“그리고, 원래 과거는 항상 삶에 묻어있는 거야.”

“….”

“벗어날 수가 없지.”

“….”

“그 애는 이만 잊어. 언니가 지금 여건이 안 되네. 너 힘들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 언니가 뭐가 미안해. 유성이 꼭 데리러 와줘. 시간 맞춰서.”

“… 아니야, 곧 갈게.”


처음으로, 언니가 먼저 수화기를 내려놓은 날이다.




겨우 밤을 보내고 다음날 언니는 바로 유성이를 데리러 왔다. 만삭이 된 언니는 남색 임부복을 입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에게는 비상 열쇠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언니가 나를 껴안으려고 했지만 나는 언니의 부른 배에 주춤거리며 자꾸만 뒤로 물러났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는지 티브이를 보고 있던 유성이가 뛰어나와 우리를 바라보며 배고파, 하고 중얼거렸다. 둥근 아이보리색 카라가 가지런히 박혀있는 옷을 입은 언니가 유성이의 손을 잡고 나를 향해 쓸쓸하게 웃어 보였다. 언니가 엄마와 너무도 닮아있어서 하마터면 언니에게 화를 낼 뻔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담담했다. 정말로 유성이를 데려가도 남편이 뭐라고 하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앞으로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왜인지, 언니는 결국 눈물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불안은 나를 통과하지 못했다.




새벽빛에 눈을 찡그리며 무심코 깨어난다. 달력을 살피니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날이 조금 밝자마자 옷을 껴입고 문단속을 하고 나왔다. 무심코 주머니 안에 손을 찌르는데 휴대폰이 진동을 토하고 있었다. 언니였다. 나는 전화를 받지 말까… 하는 싱거운 고민을 반복하다가 버튼을 눌렀다. 언니였다. 언니의 친구들이 놀러 왔는데 유성이를 예뻐해 주었다는 말을 했다. 그게 다였다. 마지막에 언니는 고맙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유성이가  나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언니네 있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하면서 부러 내 심장을 후벼 팠다.




자살입니다. 예전에, 너의 시신을 내게 보여주었던 그가 기억 속에서 입을 연다. 아니에요. 나는 부정한다. 자살입니다. 그가 매섭게 나를 몰아세운다. 사인은, 몸이 으스러졌기 때문이고요. 


아니에요. 그만. 듣고 싶지 않아요. 그만…….


기억 속에서 울리던 그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소음에 묻혀버린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걸어가는 내 뒤통수를 바람이 거세게 강타했다. 나는 너를 만난 그 날처럼 그 역에서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치며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 날이 더 밝아오자 사람들이 더욱더 몰려들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꾸역꾸역 서로를 밀치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와 똑같은 자리에 멈춰 서자 너의 유골 앞에서 엉엉 울었던 내가 떠올랐다. 자살입니다. 자살입니다. 자살입니다…….




나는 플랫폼에서 가장 먼 곳을 향해 걸었다. 가장 빠르게 지하철과 가까이 부딪힐 수 있는 곳을 향해 걷는다. 삐, 하고 이명이 들려온다. 어지러울 만큼 고개를 흔든다.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 멈추고 싶은데.


‘뭐 하는 거야.’


결국 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이리저리 눈길을 옮기며 너를 찾는다. 멍청이. … 멍청이는 너야, 대체 어디에 있어? 와도 반겨 줄 생각 없으니까 잠자코 있어. 어디에 있냐니까. 그리고 나 그렇게 엉망으로 안 죽었어. … 뭐? 네 꿈에서 나오는 거처럼. 그렇게 추하지 않다고. 우리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진공 속에서 들리는 듯했던 목소리가 멈추고 잠에서 깨듯 퍼뜩 눈을 뜨자 왁자지껄한 소음이 귀를 강타했다. 시각장애인용 노란 점자 블록 위에서 걸음을 멈추고 있는 동안 지하철이 사람들을 태운 채 역을 출발하려 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게 그것을 바라보다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떠오르는 잔상을 온몸으로 떠올렸다.




그 날. 기억 속의 그 날. 소풍날이다. 우리는 반 아이들 무리와 떨어져 잔디밭으로 간다. 우리는 나란하게 눕는다. 너의 길고 보드라운 머리칼이 바람결에 쓸려와 내 어깨에 닿는다. 네가 바람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연다. 실패했어. 뭘? 너한테 텔레파시 보내는 거. 엉? 내가 너한테 도시락 이 인분 싸오라고 하려 했는데. 아…. 뭐, 상관은 없어, 배 별로 안 고프니까. 야아… 말을 하지. 그런 걸 뭐 하러 말해. 그래도. 만약에…. 응. 내가 죽으면… …응. 너한테, 목소리를 보낼게. 응. 꿈은 보통 내 모습대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꿈? 저번에 네가 꿈에 나왔는데, 네가 엄청 웃긴 춤을 추고 있더라고. …뭐어? 자, 계속 들어봐, 그래서 말이지. 꿈은, 현실을 반영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어, 그러니까…. …. 목소리를, 들려줄게. 그래, 하지만… …. 너는 죽을 수 없을 거야. … 왜? … 내가 막을 거니까. …. 네가 좋으니까. … 내가? 좋은데 이유가 없다고 한건 너였다? … 그래. 


내가 꼭, 막을 거니까.


나는 말을 멈춘다. 시끄러운 비행기가 먼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 순간, 잔디밭에 팔을 베고 누워있던 너의 웃음이 멈춘다. 모든 것이 흑백이 된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돌려 너를 본다. 눈이 뻑뻑하다. 액자 속에 담긴 것처럼 우리는 멈춰있고, 우리가 있는 배경이 가장자리부터 까맣게 타들어간다. 나는 뜨거움을 느낀다. 너는 웃음을 입에 건 채 얼굴을 멈춰버렸다. 사실 기억 속의 시간은 멈춘 지 오래라, 바람도 불지 않는다.




나는 다시 눈을 뜬다. 세상은 그대로다, 네가 죽었대도. 그런데, 네가 스스로를 죽였으니 나는 이렇게 달라졌다. 우리의 시간들을 죽여 버렸어. 네가. 그래서 우리는 멈추었다. 우리의 모든 것. 그래서… 너를 막으려고 해. 이제야. 네가 죽은 뒤로 한 순간도 편하게 잘 수 없었던 내가. 그때부터 지금까지. 멈춰있는 내가.




두 번째 지하철이 역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그저 허공으로 발을 내딛기 위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사람들이 나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걷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고 잠깐, 사람들이 누군가를 부른다. 애타게 부른다. 아마 나를 부르는 소리일 것이다. 눈을 감았지만 겁은 나지 않았다. 요란한 소리를 싣고 오는 역 안의 더운 바람이 머리를 헝클었고 몸은 너무나, 가벼웠다. 




뒷덜미부터 스며드는 서늘한 너의 온도에, 나는 그저 작게 미소 지었다. 















독자님들, 저는 잘 있어요.

메일을 삭제하다가 몇 년 전쯤의 글을 발견했어요. 거의 유물쯤 되겠네요. 읽어봤는데, 기분이 묘하네요. 이 당시의 저에 관해서 스쳐가는 장면 하나는, 이 글을 쓸 때는 항상 제 곁에 식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과 문체가 많이 다른지는 잘 모르겠어요. 한창 불안했던 시기에 썼던 글로 생각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현재를 위한 소설로 빨리 돌아올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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