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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조 Nov 30. 2024

너의 자그마한 손가락

주말의 고백




날이 더워질 때쯤, 첫사랑을 하듯이 네 사진만 보면 떨렸는데. 그때는 아마 네가 콩알처럼 작던 시절이었지. 사람들의 축하를 받고, 다가올 입덧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못했어. 아마 그게 시작이었을 거야. 네 성별은 상관없이, 너를 잘 키우리라고 다짐하면서 나는 하던 일을 모두 미루고 밤에는 상상의 나래를 폈어. 너희 아빠와 결혼을 하고 나서도 감사하게도 별 다른 롤러코스터가 없던 일과에서, 달라진 건 유일하게 너 하나야.

내 작은 나무, 아니... 내가 키우는 나무에서 갑자기 피어난 꽃, 그 꽃이 떨어진 뒤 열리는 작은 손톱만 한 나의 열매, 나의 아가야. 처음에는 너무 작아 보이지도 않았던 네가 이제는 나를 닮은 코와 입술로 나를 놀라게 해. 의사 선생님께서 그러셨어. '아기가 엄마를 많이 닮은 것 같아요. 귀여워라.'




너희 할머니가 왜 엄마를 말끝마다 아가라고 부르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 매 순간이란다. 그냥 내 속에서 자라고 있으니, 내가 품어야만 하는 존재이니 저절로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아. 십 년 전만 해도 내가 누군가의 엄마가 된다는 건 생각하지 못했어. 내 속에서 놀라운 확률로 아기가 자랄 거라 생각도 하지 못했지. 먼 이야기였어. 너는 아빠와 엄마를 골고루 닮았으니 누가 봐도 엄마 아빠의 결실이야. 그렇게 선명한 네 얼굴을 보면서, 네가 내 뱃속에서 꼬물대다가 잠든 그 얼굴을 보면서 새삼, 거창하게 현대 의학에 감사함을 느끼고, 병원에서 나오면서 차마 간호사와 의사 앞에서는 티를 내지 못했던, 엄마의 꾹 참았던 감정을 터뜨렸지. 운 게 아니고 폴짝폴짝 뛰었어. 기억나지? 아빠는 너무 기뻐하는 날 꼭 안아주면서 '잘 크고 있다니 참 다행이야, 당신도 아가도 참 예쁘다. 품느라 고생이 너무 많아...' 하고 말해주었지. 과연, 네 아빠의 말대로 너는 내가 아플 때나 슬플 때나 엄마의 뱃속에서 잘 크고 있었구나. 기특하고 대견해. 네가 자라서 친구들을 사귀는 나이가 되어 혹여 받아쓰기를 다섯 개 이상 못 맞히더라도 절대 화내지 말아야지 다짐해 본다. 매일매일, 너와 할 것들을 생각해 보면서...




그거 아니? 엄마는, 그러니까 나는... 내심 바라고 있어. 아빠에게도 몇 번 말했는데. 네가 날 사랑했으면. 날 믿어주었으면. 그러면 나는 그 사랑을 절대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정말 매 순간 다짐해. 나도 우리 엄마에게 그러지 못했거든... 사춘기가 되어 언젠가 네가 내 속은 썩여도, 네가 나를 벗어나 만나는 다른 사람이 너를 너무 아프게 하지는 않기를... 상처가 생겨도 너무 깊게 곪지는 않기를. 가본 적이 없는 길에서 너무 위험한 결심을 하지는 않기를. 굳이 누군가를 이끄는 리더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책임감이나 무거운 감정들에 마음이 오래 잠식되지 않기를. 오래오래, 제발 내가 가는 날까지 너는 빛나는 눈을 가지고 내 곁에 건강히 살아있어 주기를. 내가 40대가 되고, 50대가 되어도 나는 너를 아가로 여길 테니까... 네가 장성하더라도, 내게는 언제나, 뱃속에서 꼬물거리던 커다란 우주로 시작했다는 걸 말이지...




매일 밤 자기 전에 듣는 아름다운 동화와 태교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울지 않았는데, 왜 아직 만나지 못 한 너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렇게 벅차서 심장이 빨리 뛸까? 할머니도 엄마가 마치 첫사랑 같다고 했는데, 그런 첫사랑이 엄마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음에 감사해. 널 위해 죽을 수 있겠지만, 너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아. 요즘은 그냥... 그런 생각이야. 모성이라는 게 생기지 않을까 봐, 힘겨운 입덧과의 싸움에 너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며 두려워했던 걸 알고 있니? 지금은 너와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하나하나 모으는 용품들만 보아도 행복하단다. 어젯밤에는 바깥에서 많은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니? 모두 너의 존재를 알고, 신기해하며 경이롭다고까지 이야기해 준 사람들과의 만남이었어. 너의 발차기 한 번에도 까르르 웃는 삼촌과 이모들 말이야. 모두 너를 자랑스러워해.




너를 건강히 품고 싶어. 엄마의 몸과 마음이 괜찮지 않은 날에도 엄마 배를 아빠가 가만히 쓸어주고 입 맞춰주는 밤이면, 네가 알고 있다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 속에서 통통 튀어 오르지. 벌써 태동이 그립다. 네가 뱃속에서 나오기 전인데도 하루하루가 아쉬워. 꼭 어른들 말씀이,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하다는데 그게 맞을 것 같기도 해. 네게 이 세상이 얼마나 밝을까. 엄마가 적응하도록 도와줄게. 아가야, 근데 엄마는 이 글을 쓰면서도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행복해서 나는 눈물이니까 이해해 줄래? 코르티솔을 마구 내보내서 네가 좀 놀라진 않을까 걱정은 되어도, 참 행복하단다.




약속 하나 할게. 엄마는 네게 부끄럽지 않게 살게. 내가 하지 못 한 것들을 네 앞에 가져다 놓고 밀어붙이는 일도 없을 거야. 아픈 곳 없이, 감사함과 염치를 알고 솔직하고 단단한 사람으로 커주면 그걸로 족해. 엄마는 백만장자가 아니라도, 그 어떤 세속의 가치와도 너를 바꾸지 않아. 대신 네가 아프면 모든 종교에 발을 붙여가며 기도할 것 같긴 해. 너는 내게 그런 존재야. 하지만 넌 그걸 몰라도 돼... 평생 몰라도 좋아.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이야기야.




내게 와줘서 고마워. 알고 있지?

많이 미숙하겠지만 네가 언제나 내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게 내 그릇을 키워 놓을 거야.

어서 품에 안고 싶어. 엄마와 아빠를 알고 있는 모두가 널 기다린단다.

사랑하는 내 아기.


- 겨울의 초입, 엄마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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