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륙 후, 맥주 한 잔! 그 의미에 대하여

윌리엄 호가스 <맥주거리>, 마네 <폴리베르제르의 바>

by Jin


인천-앵커리지-뉴욕-인천, 7박 8일!


7박 8일은 떠돌이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도 꽤 긴 여정이다.

남자 친구와의 긴? 이별이 아쉬워 070 전화기(카카오톡이 나오기 전인 2000년대 초반 사용했던 인터넷 전화기)를 들고 다니던 별명이 ‘공칠이’였던 동기도 있었고, 그저 여정 자체를 지겨워하던 이도 있었다. 드물게는 호텔에서 넋 놓고 쉴 수 있어 이런 장거리 스케줄을 은근히 바라는 이도 있었다.


내 경우엔 후자에 속했다. 특별히 그리워할 이도, 한국으로 반드시 돌아가야 할 이유도 없었던 나는 긴 여정의 스케줄을 유난히 좋아했었다.

보통 해외에 나가면 유명 관광지를 돌아보거나, 미술관을 들르기도 하고, 운이 좋아 세일 시즌이라면 플라이트 백을 내동댕이치고 곧장 백화점이나 면세점으로 달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알래스카라면…….


3일간의 체류 동안 우리는 주로 마트 탐방을 한다. 하루는 월마트, 하루는 코스트코, 마지막 날엔 망설이다 사지 못한 물건 집으러 다시 마트로…….

마트의 규모가 워낙 커서 이것저것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종일 쇼핑을 하다 피곤이 몰려오는 순간이 되면 꼭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맥주 코너! 그렇게 한 손에는 생필품과 안주, 또 다른 손에는 맥주 상자를 들고 호텔로 돌아오곤 했다.


지금 앵커리지의 모습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내가 비행을 하던 2000년대 초 만해도 우리가 머물었던 호텔은 마치 유배지나 다름없었다.


‘알래스카를 걸어 다니는 생명체는 곰과 대한항공 승무원뿐이다.’


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황량한 벌판을 한참이나 걸어 다니곤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맥주란 ‘마트에서 상자째 들고 오는 그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값싼 술’ 정도였다.

지금도 기분의 변화가 있거나 반가운 누군가를 만나면 혹은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그리고 그냥. 한 손에는 의례 맥주가 들려있다.


기원전 4000년경 처음으로 맥주를 만들었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도 나와 같은 이유에서 맥주를 마셨을까?

생각만 해도 미소가 절로 나오는 <맥주 한잔>이 갖는 의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함무라비 법전과 맥주

<함무라비 법전>,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함무라비 왕이 BC 1750년경 제정


108조 만일 맥줏집 주인이 맥주 대금을 곡물로 받지 않고 은으로 받거나 혹은 곡물 분량보다 맥주 분량을 줄이면 주인은 벌을 받아 물속에 처넣는다.

109조 만일 수배 중 범인이 맥줏집에 들어갔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숨겨 당국에 데려가지 않으면 술집 주인은 사형에 처한다.

111조 맥줏집 주인이 60 쿠아의 맥주를 신용으로 마시게 한 경우에는 수확 시기에 50 쿠아의 곡물을 징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술의 세계사> 중에서

기원전 1800년경에 제정된 인류 최초의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 내용 중 맥주와 관련된 내용이다.

‘액체 빵’이라는 별칭을 가진 맥주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이자 보리를 먹던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특별한 양조기술이 없던 고대인들에게 싹이 난 보리 즉 맥아를 빻아 발효시킨 맥주는 와인보다 만들기가 수월했다.


특히 기원전 4000년 이전부터 맥주를 마셨던 수메르인들은 수확한 보리의 40%를 맥주 양조에 사용할 만큼 술을 좋아했다. 맥주는 당시에도 계층과 관계없이 누구나 즐겨 마셨던 국민 음료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들은 기원전 2000년경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멸망했지만 함무라비 법전을 보면 바빌로니아 왕국 역시 맥주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다.


<빨대를 이용하여 맥주를 마시는 이집트인>


또한, 사후의 삶이 매우 중요했던 이집트인들은 왕의 무덤에도 맥주와 와인을 함께 매장했다. 피라미드를 지을 때도 노역자들에게 맥주는 필수였고,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은 아예 맥주 양조자들을 데리고 출정하기도 했다.

고대나 지금이나 맥주가 인간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는 건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영국인들에게 맥주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산업화와 근대화가 시작되고 <미각>이라는 개념이 싹트던 18세기 화가들은 맥주를 어떻게 담아냈을까?


<진 골목>과 <맥주 거리>


1751년에 그려진 두 작품은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주제나 소재 면에서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18세기 영국은 값싼 증류주인 진이 유입되면서 빈민가와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마약 중독과 같은 진 광풍은 온 영국을 휩쓸었고 이러한 골칫거리를 해결하고자 영국 정부는 1751년 급기야 진 금주법을 제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진을 더 깊숙한 지하세계로 파고들게 했다.


진은 증류주에 노간주나무 열매를 가미한 술로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영국에서는 18세기 초, 진 생산에 성공하면서 주로 런던 빈민가를 중심으로 소비되었는데 심지어 무허가로 길거리에서 판매하는 사람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이러한 진의 판매와 소비는 취약계층의 건강과 위생을 더욱 악화시켰고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영국인들이 손만 뻗으면 쉽게 사들일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악순환은 음주와 매춘, 각종 범죄로 이어졌고 건강 악화와 같은 치명적인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18세기 영국은 유럽의 중심지로 성장하며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어닥친 ‘진 광풍’은 국가적으로 엄청난 손실이었다.


<진 골목> 윌리엄 호가스, 1751, 영국 박물관, 동판화


호가스는 이러한 사회현상을 매우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화폭에 담아냈다.

호가스의 <진 골목>을 관통하는 전체적인 이미지는 쇠약, 파멸, 죽음이다.


이를 증명하듯 화면 중앙에 널브러져 앉아있는 여인은 젖을 먹던 아이가 계단 밑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취해 있다. 아래쪽으로 쭉 뻗은 다리에 나타난 상처들은 성병이 한참 진행된 그것으로 보이는데 여인의 표정과 행색을 보면 정상적인 삶으로 되돌아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아마도 여인은 매춘부일 것이다.

여인 아래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언제 숨이 끊어진 것인지 알 수 없는 남자가 한 손에는 진을 따라 마시던 술잔과 다른 한 손에는 술병이 쥐어있다. 여인의 머리 너머로 보이는 원경의 풍경도 두 사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른편 건물 중앙에는 관이 매달려 있고 그 밑으로 쓰러져 가는 지붕 앞에는 길거리에서 이제 막 입관되는 사람이 보인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건물 한쪽에는 목매달아 죽은 이도 눈에 띈다. 만취 상태로 수레에 실려 나가는 사람, 먹을 것이 없어 아이에게 진 잔을 기울이는 여인. 건물은 무너져가고 점점 피폐해져 구원의 손길이 닿지 않는 지옥, <진 골목>에 유일하게 번성하는 곳이 있다. 바로 전당포다. 전경의 전당포 주인은 특유의 날카롭고 악랄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꼼꼼히 살피고 있다. 그를 둘러싼 부부로 추정되는 커플은 절박한 심정으로 살림 몇 점을 맡겨보지만 보잘것없어 보인다.

이번엔 <맥주 거리>로 들어가 보자.

<맥주 거리> 윌리엄 호가스, 1759, 영국 박물관, 동판화


<진 골목>에서 관이 매달린 자리에 이번엔 맥주 통이 매달려 있다. 반듯한 건물 위에는 이제 막 건물이 지어진 것을 축하하듯 세 사람이 맥주잔을 높이 치켜들고 있다

근경의 인물들도 <진 골목>의 주인공들과는 매우 대조된다. 그들의 밝은 표정과 건장한 육체는 안정되고 건강한 삶이 전제되어야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볼록한 배를 내밀고 편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두 남자는 한 손에 거품 가득한 맥주를 들고 있다. 특히 긴 파이프를 입에 물고 한 손에 돼지 넓적다리를 쥐고 있는 푸줏간 주인은 얼큰하게 취해 무척 기분 좋은 표정이다. 하지만 처음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그의 왼손은 넓적다리 대신 프랑스인의 허리춤을 잡고 내동댕이치려는 모습이었다.

맥주 거리 부분

프랑스인은 검은색 슈트의 세련된 모습이지만 깡마른 체형으로 육중한 푸줏간 주인에게는 맥없이 나가떨어질 것만 같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영국 맥주는 프랑스의 와인과 경쟁상품이었고, 역사적, 정치적으로도 프랑스와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국 맥주는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자국의 번영과 강건함의 상징이자, 문화적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푸줏간 주인 옆으로 두 쌍의 남녀가 역시 맥주와 함께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 열쇠를 든 마부와 생선 장수에게 맥주는 정당한 노동 뒤에 맛보는 달콤한 휴식 같은 것이다. 전당포에서 겨우 마련한, 그저 취하기 위해 런던 뒷골목의 후미진 곳에서 마시는 ‘진’ 과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음료인 것이다.


풍성한 거품이 먹음직스러운 맥주를 즐기는 이들은 영국의 성장과 번영을 가져올 경제활동의 주체들이다. 이들의 삶의 터전인 건강하고 건전한 맥주 거리에 전당포는 더는 설 자리가 없다. 진 골목의 전당포는 이미 폐업상태이다.


그리고 이보다 약 100년 후인 19세기에는 주류의 표준화가 도입되면서 용기와 상표가 생겨나던 시기였다. 생산국가 혹은 생산 주체를 알 수 있는 고유의 브랜드는 작품 속에서 또 다른 의미로 해석되곤 한다.


에두아르 마네의 대표작 <폴리 베르제르의 바>를 살펴보자


프랑스에 독일산 맥주가 없다고?

<폴리 베르제르의 바> 에두아르 마네. 1881-1882. 코톨드 인스티튜트 갤러리


잘록한 허리와 볼륨 있는 가슴을 돋보이게 하는 검은색 드레스 차림의 여종업원이 우리와 마주하고 서 있다. 금발의 그녀는 지금의 눈으로 보아도 매우 세련되고 우아하다. 목에 건 메달부터 팔찌, 가슴에 꽂은 코사지까지. 과연 파리의 멋쟁이들을 상대하는 여종업원답다. 그녀는 당시 실존했던 파리의 고급 술집 폴리 베르제르의 여급, 쉬종이다.


커다란 거울을 뒤로하고 서 있는 쉬종은 그녀의 오른편 거울에 비친 모습이 말해주듯 검은색 실크해트를 쓴 신사를 응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신사에게 통 관심이 없어 보인다. 어떠한 감정도, 표정도 없다. 화려한 조명과 멋쟁이 신사, 세련된 옷차림과는 무척 대조되는 그녀의 무표정은 어쩌면 그녀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던함의 도시 파리와는 관계없이 그저 밤새 밀려드는 손님들을 대하느라 지치고 피곤한 그녀 개인의 삶 말이다.

쉬종이 두 팔을 짚고 겨우 버티고 있는, 바 상단에는 우리가 알법한 술병들이 죽 늘어서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술병 입구를 금박으로 막아놓은 것들인데 한눈에 보아도 샴페인이나 스파클링 와인임을 알 수 있다. 가장 왼편에는 ‘클라레’라는 붉은 적자색의 와인이 보이고, 오른편에 목이 긴 삼각형의 연두색 병은 ‘크렘 드 망트’라는 박하 향이 나는 리큐어이다. 그리고 그 옆으로 세워둔 갈색 병이 바로 에일 맥주이다. 병 중간쯤 보이는 붉은색 삼각형은 ‘바스’라는 상표로, 영국의 대표적인 에일 맥주이다


그런데 그림 속 어디를 찾아보아도 영국산 바스 에일 이외의 맥주는 찾아볼 수 없다. 특히 맥주로 유명한 독일산 맥주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그림이 그려지기 약 10년 전인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독일산 맥주가 수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하자 이듬해에 알자스로렌 지방이 독일령이 되었다.


마네는 의도적으로 폴리 베르제르에서는 영국산 맥주만을 취급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른바 독일산 맥주에 대한 불매운동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작품 속에서 유난히 ‘바스’ 상표가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이러한 역사적인 이유 때문이다.



인류가 사랑한 맥주

앞서 살펴보았듯이,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와 바빌로니아 왕국의 함무라비 법전과 같은 고대 기록을 시작으로 중세시대 수도원 맥주를 거쳐 1516년 독일의 ‘맥주 순수령’, 그리고 19세기 파스퇴르의 저온살균법에 따른 대량생산까지 맥주는 인류의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로는 마실 물을 대체하는 음료로, 먹을 것이 귀했던 시대에는 중요한 에너지원으로, 혹은 종교적인 이유로 맥주는 계층과 관계없이 누구나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품목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또한, 18세기 영국에서는 국가 경제의 근간이 되는 산업으로써 공동체적 정체성의 형성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이러한 다방면의 활약? 에도 불구하고 맥주는 그 진가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마트에서 상자째 들고 오는 값싼 술로 치부해버리기에는 그 역사와 가치,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 결코 가볍지 않다. 이쯤 되면 냉장고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맥주를 취하기 전에 음미하고 싶어 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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