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주는 감정의 반전
어떤 여행은 떠올리면 맛있었던 음식, 아름다웠던 풍경보다 예고 없던 기상이변이나 일정대로 되지 않아 당황스럽거나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의 이유>에서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여행이라는 조건은 달린 하루는 돌발 상황이 생기더라도, 시련이 닥쳐도 여행이라는 자체로 유의미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어쨌든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가령, 신혼여행으로 간 하와이에서 한가로이 길을 거닐다 한국에서도 맞아본 적 없는 새똥을 맞고, 와이키키 해변에서 스노클링을 하다가 수많은 물고기 사이에서 사람 똥을 발견한 경험이 그렇다. 바다에서 똥을 발견하고 기겁하며 바다를 탈출했고, 묽은 새똥이 내 머리카락과 팔에 묻었을 땐 마땅히 닦을 것도 없어서 당황스럽기만 했다. 하와이 하면 똥부터 떠오르는 몹쓸 추억이지만 당시의 나빴던 감정은 해독이 됐는지 이제는 웃기기만 하다. 하와이에서 길 가다 새똥 맞고, 와이키키 해변에서 똥이 떠다니는 걸 본 사람은 아직까지 내가 유일하다.
하와이 신혼여행 후 1년이 조금 지나 남편과 나는 사이판에 갔다. 비행기 출국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여유를 두고 집에서 출발했는데 그날따라 시간은 빨리 흐르고 우리가 탄 버스나 지하철은 천천히 움직였다. 출국 수속을 밟고 게이트를 통과했을 때 이미 비행기 탑승 완료 시간이 임박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하필 우리가 예약한 항공사는 저가항공사라 게이트에서 제일 먼 곳에 탑승구가 있었고 버스를 타고 한 번 더 이동해서 타야 했다. 이때 임신 계획을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난 혹시나 임신을 했을까 봐 뛰지도 못했다. 종종걸음으로 속도를 내면서 겨우 탑승 완료. 우리가 마지막 탑승객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임신은 무슨, 여행 이틀째에 생리가 시작돼 바다 천지인 사이판에서 제대로 물놀이를 즐기지도 못했다.
물놀이는 못했지만 사이판의 새파란 바다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파란 바다는 처음이었다. 하와이에 갔을 때 초록빛 깨끗한 바다에 넋을 잃었는데 사이판 바다는 그야말로 바다색을 새로 정의해 주었다. 5박 6일 동안 사이판 곳곳에 있는 바다를 실컷 봤다. 이때 본 파란색이 내가 이제껏 본 파란색의 양보다 많을 거다.
그런데 사이판 여행을 떠올렸을 때 내 기억의 우선순위는 바다도 아니고, 물놀이도 아닌 뷔페다. 우리는 3일째였나 4일째였나 점심을 호텔 뷔페를 먹기로 했다. 사이판에서 아쉬운 게 있었다면 음식이었다. 현지 음식은 어딘가 내 입맛에 맞지 않았고, 프랜차이즈 음식은 이미 아는 맛이니 새롭지 않았다. 그래서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뷔페에 기대가 컸다.
참고로 남편과 나는 둘 다 영어를 잘 못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남편은 잘 못하지만 자신감이 있어서 뭐라도 내뱉는다면, 나는 영어를 못하고 자신감도 없어서 남편 뒤에 숨어 땡큐만 한다. 그래서 우리 둘은 아주 자유로운 여행을 하기엔 제한이 따를 수밖에 없다. 호텔 뷔페를 먹으려고 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사람이 제법 있었다. 20여 분 정도를 기다린 후 우리 차례가 왔고 남편은 직원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테이블에 앉자마자 남편이 말했다.
"우리 35분 동안 먹어야 해."
"35분? 시간이 너무 짧잖아. 뷔페에서 35분 만에 어떻게 다 먹어?"
"모르겠네.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이상하네. 벌써 3분 지났어. 일단 그냥 먹자."
'30분이면 30분이고, 1시간이면 1시간이지. 35분은 또 뭐람.'
궁금했다. 하지만 묻고 따지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이상하긴 했지만 여긴 그런가 보다 하고 35분 동안 열심히 먹었다. 35분 안에 뷔페 음식을 종류별로 다 맛보려면 1분 1초가 중요했다.
우린 그때 뭘 먹었을까. 사진이라도 찍어둬서 다행이다. 저 수프와 샐러드와 고기의 맛은 기억이 전혀 나지 않지만 35분 동안 대화 없이 부지런히 접시에 음식을 담고, 먹고 했던 건 선명히 기억난다. 뷔페에서 우리가 제일 급하게 먹는 거 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어쨌든 부랴부랴 35분 동안 뷔페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고 나왔다. 영수증을 봤다. 1인당 35달러였다.
그렇게 우리는 35분 동안 열심히 먹은 35달러짜리 뷔페 이야기를 매년 한두 번은 한다. 그때는 여유롭게 먹지 못하고 뷔페 음식도 다 먹지 못해 아쉬웠고, 왜 나는 남편 말을 전적으로 믿었을까 휘회했다. 지금은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사이판 여행 이후 아이들이 생겼고, 이제는 아이들과 여행을 가도 될 만큼 아이들이 조금 자라주었는데 시국이 허락하지 않는다. 사이판 여행이 남편과 둘이서 간 마지막 해외여행이 돼버렸다. 하와이든 사이판이든 여행이란 자체로 좋았지만 그때의 좋지 않았던 기억도 지금은 좋은 기억이 되었다. 언제 또 여행을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시국이라 지난 여행들의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