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호 피해자와 1705호 가해자

둘 다 저입니다만

by 작은나무

층간소음이라는 단어를 보거나 들으면 가슴이 덜컹한다. 지금 층간소음 가해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막 6세와 4세가 된 아이들에게 하루도 뛰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날이 없다. 아이들에게 늘 당부하고 나 역시 걸을 때 조심하며 지내고 있다. 아직은 아랫집의 연락을 받진 았았지만 우리 집은(충분히 예상 가능한) 가해자다. 이런 나도 한 때는 명백한 층간소음(정확하게는 벽간 소음) 피해자였고, 또 명백한 층간소음 가해자였다.


밤마다 들리던 귀신 소리

신혼집은 서울 강동구의 작은 빌라였다. 한 층에 네 가구가 사는 구조였다. 1층은 주차장, 2층부터 집이 있는 필로티 구조였고, 우리 집은 출구에서 제일 안쪽 집인 201호였다. 설레는 마음 가득 안고 신혼집에 입주했는데 어느 날부터 밤마다 여자가 흐느끼는 소리와 고음으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잘못 들은 건 줄 알고 무시했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음의 울음 혹은 웃음소리는 거의 매일 밤마다 들렸다. 한 번 소리에 귀가 트이니 들릴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어디서 들린다고 정확한 위치를 알아낼 수가 없어서 그냥 넘기고 지내던 어느 날 밤 12시가 다 되어갈 무렵,


띵동 띵동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옆집 202호에 사는 사람인데요. 저희가 여자들끼리만 살아서 그런데, 죄송한데 남편 분이 경찰에 203호 신고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혹시 이상한 소리 안 들리세요? 매일 밤마다 203호에서 귀신 소리를 틀어요. 벽으로 소리가 울려 퍼져서 너무 무섭고 스트레스예요. 근데 어떤 사람이지 알 수가 없으니 함부로 찾아가기도 무섭고요. 신고 부탁드려도 될까요?"


남편과 나는 귀신 소리의 근원지를 드디어 알았고 202호 자매와 한 마음으로 경찰에 신고를 했다. 빌라였기 때문에 관리실도 없었고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었다. 신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왔고, 무서웠던 난 집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고 현관문에 귀를 바짝 붙였다.

띵동!

"경찰입니다. 귀신 소리가 들린다는 민원이 있어서 왔어요."

"아, 제가 지금 영화를 보고 있는데 볼륨이 컸나 봐요. 그것보다 303호가 너무 시끄러운데 거기로 가주셔야 할 것 같아요."


나긋나긋하고 예쁜 목소리를 가진 203호 여자(성별은 추측)는 아무렇지도 않게 도리어 303호를 층간소음 가해자로 지목했다. 경찰은 303호에도 들려 자초지종을 듣는 것 같았다. 며칠 후 빌라 출입구에 화가 잔뜩 난 듯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 건물에 코끼리가 사나 봐요. 쿵쿵쿵. 너무 시끄럽네요. 조용해지지 않으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저희 집에 찾아오셔도 아무 소용없으니 찾아오지 마세요. ㅡ 203호


실제론 A4용지 반 이상을 채운 긴 글이었지만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이후에도 한동안 귀신 소리는 계속 들렸다. 그리고 위쪽에서 뭔가 무거운 물건이 쿵쿵 떨어지는 소리와 내려찍는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두 소리는 경쟁하듯 자주, 크게 들렸다. 그 빌라에 살던 동안 203호 여자와 303호의 아무개 씨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두 집의 진짜 속사정은 뭐였을까 알 수 없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더니 우리 부부 상황이 그랬다. 왜 아무 상관없는 우리는 벽을 타고 들려오는 섬뜩한 귀신 소리와 무너질듯한 천장 때문에 두려워해야 했을까.


이웃님, 부탁드립니다

2년 6개월을 살던 빌라에서 우리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우리 가족은 둘에서 넷으로 늘었다. 누군가 '아이는 뛰어다니려고 태어난 존재'라고 했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우리 집 두 꼬마는 수시로 뛴다. 고작 15kg, 11kg의 무게밖에 나가지 않는 몸이지만 걸음소리만은 60kg이 넘는 남편보다 크다. 아이들은 쿵쿵쿵 재빠르게 발걸음을 거실에서 주방으로, 주방에서 다시 작은방으로 옮겨 다니기 바쁘다.


"뛰지 마. 아랫집에서 얼마나 시끄럽겠어."

"누가 너희 머리 위에서 뛴다고 생각해 봐."

"남한테 피해 주는 행동은 하면 안 돼."

"그렇게 뛰어다니면 밤에 잘 때 다리 아파."


이 외에도 갖가지 이유를 들어 아이들을 말리기 바쁘다. 작년에 코로나 시국으로 아이들이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 상황은 더 악화됐다. 결국 아랫집에서 보낸 쪽지를 받았다.

이웃님, 부탁드립니다. 집에 시험을 준비하는 딸이 있어요. 아이들이 뛸 때마다 눈물짓네요. 부탁드립니다.


쪽지를 본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고 너무 죄송했다. 당장 아랫집에 찾아가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불쑥 찾아가면 아랫집에서 불쾌해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렇게 혼자만 미안해하고 넘어가면 안 될 일이었다. 당장 펜을 들고 편지를 썼다. 종이 한 장을 거의 가득 채울 정도로 썼는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1605호 이웃님, 정말 죄송합니다. 진작 제가 먼저 찾아가 사과드렸어야 하는데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려 통제가 잘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이것 또한 저의 불찰입니다. 그동안 정말 많이 참고 힘드셨을 텐데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따님에게도 중요한 시기에 민폐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혹시 따님이 주로 공부하는 시간대가 있을까요? 모든 시간에 조심하겠지만 그 시간에는 되도록 외출을 하거나 더 주의하겠습니다.


진심으로 죄송하고, 죄송하고, 죄송했다. 롤케이크와 편지를 문 앞에 두고 왔다. 층간소음 피해자로 살았을 때보다 가해자로 사는 게 훨씬 마음이 힘들었다. 피해자로 살 땐 내 마음만 통제하면 됐다. 가해자 입장이 되니 더 애가 탔다. 인터폰이 울릴까 봐 조마조마, 안 울려도 얼마나 참고 계실까 조마조마했다. 무엇보다 내가 피해자로 살아봤기 때문에 소음으로 힘든 심정을 잘 알았다. 아이들은 애타는 내 마음도 몰라주고 조금만 방심하면 또 쿵쿵거렸다. 혹시나 아랫집 이웃이 변명만 가득한 편지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걱정하며 그날 밤 잠을 설쳤다.


두둥, 다음날 쪽지가 또 왔다


다음 날 저녁, 우리 집 현관문에 또 쪽지가 붙어있었다. 노란 포스트잇을 보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쪽지에는 "이웃님.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문구와 아기 과자 한 박스가 함께 놓여있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은 내가 해야 할 말인데 오히려 듣다니. 정말 아랫집에 다시 한번 죄송하고 감사했다. 아이들도 아랫집 아저씨가 가져다준 과자를 맛있게 먹었고 아이들에게 아랫집의 배려가 온전히 전달되길 바라며 주의시키고 조심시켰다. 6개월 후 우리는 이사를 했고, 이사 가기 전 날 1605호에 들러 그간의 배려에 대해 감사인사를 했다.


이사를 온 지금도 우리 집엔 아랫집이 있다. 아직 층간소음 피해 연락을 한 번도 받진 않았지만 층간소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참고 있는 거라 생각한다. 다행히 아이들도 본인들의 발소리가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걸 조금은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달리긴 하지만 안된다고 하면 멈출 줄 안다. 하지만 멈추기까지의 몇 초도 신경이 쓰인다. 누군가가 쉬는 공간이 우리 가족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공간이 될까 봐 늘 전전긍긍한다.

죄송하다, 주의하겠다는 인사에 오히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쪽지를 준 1605호 이웃님과 수시로 들릴 소음을 참고 계실 지금 아랫집 이웃님의 배려에 꼭 보답하고 싶다. 그들이 집에서 편히 쉴 당연한 권리가 우리 때문에 침해받지 않도록 애써야겠다.


"얘들아, 제발 사뿐사뿐 걷자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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