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미련 Oct 17. 2022

 세월을 읽다  

'그래 오늘만큼만, 딱 이만큼만이라도'


 새벽을 가르고 저벅저벅 그녀가 온다. 먼 곳의 그녀가 문 밖 가까이서 서성이고 있다. 애써 귀를 막고 고개를 가로저어도 어느새 문 앞! 드러나는 실루엣이 살 떨리게 싫다. 얼른 일어나 세수를 한다. 차가운 물에 마틀마틀한 살결이 정돈되길 바랐건만 더 무끈해 졌다. 거울 속 그녀는 오늘 하루만큼 가까이 다가와 태연히 나를 맞는다. 나는 또 오고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 꼼짝없이 그녀의 포로다. 


 낯설기도 했지만 사십 대 언저리에서는 ‘그래 올 테면 와라’ 꽃길을 놓아주기도 했다. 젊은 혈기로 별 거 아닌 양 의연히 맞아주었다. 문제는 지인들의 혼란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그들은 그녀를 불편해했다. 몇 번의 고집 끝에 반백을 포기하기로 했다. 염색으로, 짙은 화장으로 포장을 하면서 다가온 그녀를 멀리했다. 한동안 감추고 밀어내다 보니 그녀의 모습을 잊고 살았다. 변장한 모습이 진짜 같았다. 포장한 내가 나답다 착각하고 살았다. 


 한 친구는 의연했다. 반백을 넘어 백발에 가까운 머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몇 년의 인내로 모양새를 완전히 바꿨다. 그런데 사람들의 오해가 들끓어 가는 곳마다 신분증 대조를 요구했다. 할머니가 젊은이 행세를 하려 든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불편한 심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토로했다. 


 하여 오랜 인내로 얻은 단정한 백발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갈색머리를 하고 나타난 그녀! 언덕 하나가 툭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백발이 승승장구하길 바랐다. 나도 가야 할 길이기에 선발대가 목적지에 무사히 안착하길 바랐다. 이정표가 사라진 지금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할 뿐이다. 


 문제는 문제다. 한 달도 안 되어 차오르는 백발을 무슨 수로 막아선단 말인가. 염색의 부작용도 만만찮다. 눈도 개진 개진하고 눈물도 때 없이 쏟아진다. 딸아이가 아이를 낳으면 그녀를 의연히 맞이할 수 있을까. 백발 할머니의 어감에는 초라함보다 기품 있는 우아함이 먼저 떠오르니 말이다. 

 그녀는 머리로 끝나지 않았다. 그때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늦은 밤 거울 속에서 오롯이 그녀와 마주했다. 문상객을 맞이하느라 피곤하기도 했다만 느닷없이 나타나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운 좋게 잘 피해 다녔건만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눈꺼풀을 덮어 세모눈을 만들고 이마엔 냇물이 흘러도 좋을 골을 깊게 패고 눈 가장자리 사이사이로 맘대로 그려놓은 내 천자에 흘러간 세월을 보란 듯이 진열하고 있었다. 더 이상 숨바꼭질은 부질없는 짓 같았다. 


  불청객이 분명한데 그렇다고 쫓아낼 방법이 없다. 도린곁만 기웃거리던 그녀가 누가 반긴다고 현관문을 열고 거실을 돌아 이제 안방까지 차지할 기세다. 누가 나를 좀 낯선 이곳에서 빼내어주었으면.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친구가 애타게 그립다. 그녀의 그녀도 어금지금하게 다가와 포로 신세인 걸 알기에 전에 없던 동지애가 샘솟는다. 닮은꼴 딸보다 친구가 위로고 기댈 어깨다. 오늘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처지는 눈꺼풀 때문에 시야가 좁아든다 했더니 여러 비방이 나왔다. 의술에 기대지 않고도 그녀를 멀리할 꿀 팁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둘도 없는 동지다. 외롭지 않은 동반자다.


 그녀의 존재를 실감할 때가 갈수록 늘고 있다. 그녀는 멀쩡해 보이는 거죽 뒤에 숨어 나를 조종하려 든다. 팔이며 다리며 부분 부분이 조여 올 때는 내 몸이 풀 죽은 삼베옷 같다. 쪼그라드는 근육이 세월에 굴복하는 순간이다. 뼈를 단단하게 지탱하던 근육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연한 바람에도 풀풀 날리는 기분이다. 

 연결고리에도 이상 신호가 온다. 활발하게 움직이던 관절이 뻣뻣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구부릴 때마다 힘들다 쉬어가라 명령이다.  삐걱거리는 걸 보니 그도 엄살이 아니라 제 자리에서 이탈한 게 분명하다. 갈수록 헐거워 시동 걸기도 힘들고 걸린 시동을 유지하기도 버겁다. 자꾸만 급한 걸음을 붙잡아서 마음만 내달릴 때가 많아졌다.  


 그녀는 몸을 뒤틀어 혼미하게 하더니 이제는 정신까지 잠식하려 든다. 세상으로 난 창을 하나 둘 거둬들인다. 이글거리는 도시의 불빛이 금단의 땅처럼 낯설다. 다가서면 델까 걱정부터 앞선다. 혼돈과 열정의 시대는 꿈처럼 아득하고 조바심과 안정이라는 키워드만 나를 지키고 있다. 잔잔한 파고는 삶의 활력이었고 제법 큰 파고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보증서 같은 거였다. 낑낑대며 뛰어넘으면 해 냈다는 짜릿함에 서둘러 다음 일정을 짜곤 하였는데. 젊음은 그런 거였다. 보내고 나니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산이었다. 그녀는 소원하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다. 그녀가 야속하여 자꾸만 뒷걸음질이다. 


 완충장치도 고장이 잦다. 탄력은 사라지고 돌덩이가 되었다. 손톱만큼이라도 신경 쓰이는 일이면 소화를 못 시키고 꺽꺽 되새김질을 한다. 사는 건 지뢰밭을 건너는 일. 심장을 가격하는 폭탄이 지뢰처럼 숨어 있어 발을 내딛을 때마다 조심스럽다. 소심하고 더딘 게 세월 탓인 것 같아 쓴소리를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다. 


 그래도 숨 쉴 틈을 주는 게 고맙다. 간혹 볕 좋은 날엔 그녀도 해찰을 하는지 나를 버려둘 때가 있다. 그녀의 그림자가 사라지면 몸부터 활기를 찾는다. 비실대던 세포들이 살아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심장의 펌프질도 제법 거세다. 무엇보다 마실 간 의욕이 돌아와 어디든 떠나자 부추긴다. 세상은 환희에 차고 나는 길 위를 나선다. 부디 좀 더 긴 여행이 지속되길 소리 없이 외친다. ‘그래 오늘만큼만, 딱 이 만큼만이라도 제발.’  


이전 02화 기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