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퇴장이 낯설지 않은 순정한 시간으로 내게 온다
그녀는 지하 깊은 곳에 갇혀있다. 지상의 것들은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곳에서 그림자처럼 산다. 햇살은 잊은 지 오래다. 아무리 태양을 떠올려보아도 눅눅한 몸은 좀체 마르지 않는다. 절망하고 태양을 잊은 듯 사는데 어디선가 빛이 칼날같이 스며든다. 눈이 부셔 바라볼 수가 없다. 실눈을 뜨고 다시 응시한다. 지상을 잇는 바늘 같은 틈새로 햇살이 소나기처럼 내린다.
자주 상상하는 이미지다. 길이 막혀 앞이 막막할 때 틈새로 쏟아지는 한 줄기 빛은 어제의 보상이고 오늘을 버티게 하는 힘이다. 틈이 주는 위안은 통 창으로 푸지게 쏟아지는 태양의 열기와는 비교되지 않는다. 얕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한줄기 햇살이 통 창의 열기를 거뜬히 이기고도 남음이 있다. 없는 가운데 얻은 하나는 흔한 열개보다 귀하고 강하다. 많고 적음은 상대의 수용 여부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기에, 숫자의 절대성이 무참히 깨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틈이 주는 위안이 이리도 큰데 여전히 틈에 인색하다.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가리고 메우기에 바쁘다. 틈에 기생하는 허물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허술한 가슴으로 숭숭 바람이 드나들어도 멀쩡하게 변신을 한다. 포장 기술이 좋아 예쁜 이름표를 달고 ‘오늘은 맑음’이라는 # 버튼까지 곁들인다. 나도 틈을 가리느라 늘 힘에 부쳤지만 다른 방법을 몰라 어정쩡한 위치에서 불편하게 살아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남편은 첫 만남부터 틈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었다. 틈이 흠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 자유로워 보였다. 어눌한 말투, 한쪽으로 기울어진 슈트와 성근 신발 끈이 그의 성격을 말해주었다. 안전을 위해 절대 값을 찾아 헤매는 연구자로 보이지 않았다. 틈새를 비집고 다가가 손목을 덮은 소매를 걷어 올려 주고 싶었다. 그의 헐거움이 낯선 이에게 겨누던 나의 날을 무디게 했다. 틈은 흠이 아니라 단단한 자신감으로 보였고 외부인에게 가로놓인 마음의 벽을 허물어 주었다.
일 년간의 연애 끝에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한 가지 답만 있는 게 아님을 처음부터 안 사람처럼 남편은 유연했다. 걸핏하면 열쇠를 잊고 들어와도 당황하지 않았다. 되짚어가면서 찾아내는 과정을 즐거워했다. 파이고 깎이고 때로는 뭉툭하니 잘려나가면서 다시 곡선으로 이어지는 것이 삶이라 말하는 듯했다. 현무암 담벼락처럼 허술한 그의 하루가 자연스럽게 굽이치는 삶의 지문 같아 편안했다. 그를 보고 있으면 서투른 나의 하루도 안심이 되었다.
옳다고 생각되는 일에는 참지 못하고 핏대를 세우는 성급함은 의외였다. 자신의 생각에 집중하느라 서툴고 거칠어져 많은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다. 모난 세상에 이리저리 부딪기도 잘 하지만 계산할 줄 모르는 순수함도 틈이 많아 지키는 듯했다. 진솔하지만 빈틈이 많은 대처가 그이를 곤경에 빠뜨리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곁에서 손발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의 틈이 그와 나 사이의 틈을 메워주었다.
오래전 뉴질랜드행도 틈이 많은 그이라서 결단할 수 있었다. 현실이 버거워 숨이 차 헐떡일 때 남편은 외국행을 제안했다. 아이 교육을 핑계로 현실을 벗어나길 바랐다.
일상의 수레바퀴가 점점 덩치를 불려 달려오는 듯했다. 방향 없이 거대한 물살에 떠밀리는 기분이었다. 구르는 바퀴를 멈춰 세우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앞지르는 그들과 점점 벌어질 간극을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했다. 지금까지 들인 그만큼의 시간과 이탈한 후에 다가올 후폭풍을 각오해야 했다. 아이들의 미래가 걸린 문제라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냥 지나쳐 가기도, 그렇다고 멈춰 서기도 난처한 순간에 남편의 결단은 실마리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적절한 때에 틈을 선물한 그가 고맙다. 그곳에서는 줄곧 아이들과 함께 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나머지는 오롯한 내 시간이었다. 낯선 곳에 서니 자신이 더 잘 보였다. 저무는 하루가 아까워 햇살을 받으며 종일 테라스에서 뭉그적거렸다. 나목에 붙어 있는 삭정이가 힘줄 좋은 여름 포도넝쿨이 되는 것을 보면서 내 안에 숨어있는 생명력을 포도나무처럼 끌어내고 싶었다. 포도나무는 그 후로도 쑥쑥 자랐다. 죽은 듯 살다가도 틈에 본 포도넝쿨을 떠올리면 신기하게 힘이 불끈 솟았다. 멈춘 듯 보이나 멈추지 않았고 어느 때보다 지혜롭게 바삐 가고 있었던 지점이라 생각한다.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며 잠시 쉬어가기도 하니 틈을 제대로 누린 게 맞다. 그냥 두면 전진밖에 모르는 삶의 수레바퀴를 잠시 멈춰 세운 시간. 자주 뒤돌아보아도 불안하지 않은 유예의 구간이다. 틈은 빈 것이 아니라 자연 상태처럼 애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난겨울에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남편과 함께 달리기에 도전했다. ‘런데이’라는 프로그램에 따라 걷고 달리는 훈련이다. 8주 만에 30분 내내 쉬지 않고 달리는 힘을 기르는 것이 목표다. 오래간만에 뛰려니 1분간 이어달리기도 힘에 부쳤다. 처음엔 1분 뛰고 2분을 쉰다. 점점 뛰는 시간이 늘고 걷는 시간이 줄어든다. 마법처럼 틈을 통하여 목표에 도달하게 하는 프로그램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틈의 소중함이 깊숙이 다가왔다. 뛰는 동안 걸을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거다. 틈에 맛보는 짜릿한 성취감과 온전한 평화. 틈은 달리게 하는 힘이요 희망이라는 걸 그때 느꼈다. 걷는 틈에 보니 달려온 좀 전이 뿌듯하고 걷고 있는 이 순간이 달려갈 다음번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닌가. 틈이 있어 이어 달릴 수 있었다. 틈은 완전한 것에 기생하는 단어가 아니라 필수 불가결한 독립된 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을 꿈꾸는 사람이 위험한 이유를 생각한다. 잘못 디디면 떨어지고 마는 아슬아슬한 상태를 즐기기라도 하듯 팽팽한 고무줄 위에 서서 곡예하듯 생을 산다. 승모 근이 올라가고 미간은 좁아든다. 응시하는 눈동자에 영혼은 이미 탈출하고 없다. 한 곳에 붙박은 시선은 얼어붙어 초점을 잃었다. 숨길을 막아섰으니 언제 끝날지 모르는 단말마 생이다. 완벽은 팽팽한 고무줄처럼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스스로 만족스러울지 모르나 보는 이는 숨이 차 피하고 싶을 뿐이다.
아파트 건물 틈으로 저녁 해가 걸렸다. 선이 뚜렷한 무광의 붉은 달 같다. 저무는 노을을 보면서 세공사가 세공하듯 문장을 다듬다 보면 흠씬 글밭에 빠진다. 틈새로 갈망하던 그곳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 다가온다. 화려한 퇴장이 낯설지 않은 순정한 시간으로 내게 온다. 다시 차오를 완벽한 내일이 틈새에 주렁주렁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