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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련 Oct 29. 2022

묵은 발톱

여물지 못한 새끼 보호하느라 살집을 놓지 않는 묵은 발톱이길 바랐을 테지


  식탁 모서리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순간 발끝의 통증이 가슴을 조여 왔다. 엄지발톱에 멍이 들었다. 발톱 안에는 삐죽거린 피가 그대로 말라 시꺼멓게 변해갔다. 사람들 앞에 서면 샌들 밖으로 드러나는 발톱이 미워 나도 모르게 엄지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거무죽죽한 발톱으로 여름을 보내야 했다.

  분기쯤 버텼나. 기어이 떨어져 나갈 모양이다. 차가운 밤공기를 가둘 요량으로 이불깃을 끌어당기는데 순간 뭔가가 걸렸다. 앗, 살점이 뜯겨나가는 통증. 죽어가던 발톱이 툭 떨어졌다. 미련 없이 떨어내버리려는데 다른 쪽 끝이 살점을 꽉 붙잡고 있다. 덜렁거리는 채로 며칠을 보냈다. 한 번 맛본 통증은 나를 겁쟁이로 만들었다. 어디에 또 걸리면 엄습할 통증이 상상되어 대처를 서둘렀다. 힘을 주어 떼어 내버려야겠는데 쉽지가 않다. 왼쪽 끝 부분이 새 발톱으로 아직 차오르지 못하여 살집에 매달려 있다. 

 분리의 아픔을 온 몸으로 느낀다. 만져보고 조심조심 흔들어본다. 거북등껍질 같은 그것은 꺾였으면 꺾였지 휘어질 줄을 모른다. 할 수 없이 살점에 붙어있는 부분은 남겨두고 나머지를 도려내기로 했다. 덜렁거리는 부분을 분리하느라 강제집행을 시작했다. 그 안에는 곱고 여린 발톱이 홀로서기를 하고 있었다. 살을 뚫고 살곰 고개를 내미는 여린치가 기특하여 몇 번이고 쓰다듬어 주었다. 

 남겨둔 귀퉁이 묵은 발톱의 귀추가 궁금했다. 이미 잘라낸 부분에는 새순 같던 아가 발톱이 여물어 가는데 이쪽은 아직 때가 아니라며 감싸고 있다. 덜 자란 애기 발톱을 홀로 두고 떠날 수 없나보다. 잘려 나가고도 버티는 그의 운명이 애처로워 보였다. 

 세상은 떠나고 다가오는 것들과 맞물려 고요한 듯 균형을 유지한다. 비워내면 차오르는 순리 속에 나도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난간에 매달려 공중곡예를 하던 여름 끝 거미도, 세상을 화려하게 물들이던 가을 날 단풍도 사라져버렸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고 읊조리던 가수도 담배연기처럼 가고 없다. 김광석은 가고 그의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메우고 있다. 격한 슬픔도 흘러가고 우리는 그의 부재를 무심히 바라보아도 괜찮은 지점을 건너고 있다. 가고 오는 것들에 익숙해지면서 삶의 변주를 즐기게도 되었다. 잊은 채 이별이 일상인 듯 산다. 

 그런데 어떤 이와의 이별은 이별로 끝나지 않는다. 가슴에 별이 되어 다시 반짝인다. 어릴 적 내게 엄마는 세상으로 난 창이었다. 엄마를 기대지 않고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작은 상처에도 토끼 눈이 되어 엄마의 눈동자 속에 숨어들었다. 묵은 발톱 속에서 살점과 채 분리되지 못한 여린 발톱이었다. 눈 감으면 엄마가 가고 없는 상상을 자주 했다. 무섭고 불안하여 철퍼덕 퍼질러 앉아 목 놓아 울던 꼬마. 구름 낀 날이면 환영이 현실처럼 끔찍하게 다가왔다. 선잠을 자다가 몇 번이고 엄마의 젖가슴을 찾았다. 홀로서기는 요원한 일 같았다.  

 세상을 얕잡아 볼 때가 되었을 때 목숨 같았던 엄마도 시시했다. 홀로서도 문제될 게 없는 냉정함을 자연스레 터득했다. 이제는 엄마가 애달아 나를 찾았다. 딸이 궁금하여 내 곁을 맴돌았다. 전화통이 울리면 엄마의 목소리. 당연한 전화에 설렐 일도 없었다. 무심한 말투가 엄마의 가슴에 얼마나 많은 빗금을 쳤을지. 그 때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엄마가 부여한 나만 가진 특권이라 생각했다. 세상이 재미있어 해찰하는 동안 엄마가 나를 떠나고 있었는데 나는 알지 못했다. 7년간의 병상 생활 끝에 엄마는 훌훌 내 곁을 떠났다. 홀로서기는 이별의 예행연습 같은 것. 홀로서기가 가능해 지니 엄마의 시간도 순순히 흘러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도 엄마는 버티고 버티다가, 세상을 향해 벼리던 딸의 칼날이 무뎌진 걸 확인하고서야 이별을 알렸다. 떠나지 못하고 차오른 아기 발톱이 거쿨진 물상에 적응할 때를 기다린 묵은 발톱처럼 엄마도 힘겹게 딸의 곁을 지켰으리라. 덕분에 지금은 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마음이 가볍다. 이별한 적 없는 듯이 엄마를 무시로 만난다.

 나와 딸애는 어디쯤 서 있을까. 한 달 전에 짝을 만나 결혼을 했다. 고운 드레스를 입고 대기실에 앉아 있는 딸애를 보니 울컥 눈물이 났다. 다섯 살 때였던가. 잠자는 아이를 두고 잠시 시장을 다녀오니 그 새 깨어 동네가 떠나가랴 울어댄 아이이다. 혼자 버려둔 엄마를 향한 원망의 눈빛. 세상에 없는 고립감을 감당하기에 아이는 너무 어렸지 싶다. 여물지 못한 새끼를 보호하느라 살집을 놓지 않는 묵은 발톱이길 바랐을 테지. 엄마와 담을 쌓는 것만이 자기를 지키는 길이라 생각했을까. 아무리 으르고 달래도 곁을 주지 않았다. 그 후로 아이 몰래 나가는 일은 다시는 하지 않았다. 

 겁 많고 소심한 아이가 세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기 시작하더니 저 너머의 세상도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엄마와 분리의 아픔을 잘도 견뎌 홀로서기에 성공한 딸이 대견하다. 엄마밖에 없던 세상이 여러 사람을 들이고도 남을 만큼 넉넉해졌다. 겨자씨만 하던 타인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세상을 품을 만큼 거대해졌을까. 홀로서기는 네가 없어도 견딜만하다는 의미이다. 세월이 흘러 나의 부재가 당연해 지는 날, 아이는 나와의 이별 또한 자연스럽게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겠지. 그 옛날 내가 그랬던 것처럼. 

 딸이 자유로울 수 있게 비껴서야 하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일부러라도 엄마를 찾았으면 좋겠다. 갈림길에 서서 혼란스러울 때 그래도 아직은 제일 먼저 엄마 품이 생각났으면 좋겠다. 꼼지락꼼지락 내 품을 파고들던 그 때의 아이가 노곤하게 쉬어가는 꿈을 꾼다. 잊힌 듯 사는 데 익숙해지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흘러야 할까.

 묵은 발톱은 나머지 아기 발톱에게 세상을 건네주고 떨어져나갔다. 언제인지 모르게 조용히 떠났다. 살집인지 발톱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로 핑크빛 여린 치가 하루가 다르게 야물어간다. 붉어 죽죽 하던 것이 누르스름하니 어엿한 발톱의 품새다. 강단도 생겼고 자잘한 돌부리쯤은 거뜬히 견뎌낼 것 같다. 행여 다칠 새라 신경이 쓰였는데 멀찍이서 그것의 새 출발을 응원해주면 될 것 같다. 홀로서기는 내게 더 다급한 문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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