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끓는 감정이 수위를 위협할 때 고백을 한다. 다행이다. 상대의 눈빛에서도 참아왔던 사랑이 알알이 쏟아진다. 사랑의 꽃 잔치가 시작되고 위태롭게 일렁이던 잔물결이 너울지듯 춤을 춘다. 황금 들녘처럼 사랑이 익어 둘은 애초에 하나였던 듯 자연스럽다. 서로에 취해 너를 위해서라면 내가 죽어도 충만할 것 같은 신기한 경험을 한다.
그렇게 시작된 사랑도 유지하려면 눈물겨운 과정을 겪어야 한다. 세월 따라 긴장의 끈이 풀리고 나른한 권태가 습관처럼 끼어든다. 시샘하는 눈길도 많다. 기회를 엿보던 붉은 장미가 향기를 앞세워 사랑을 힐끔거린다. 복병처럼 숨어 있다가 틈을 비집고 나타난 연적이다. 팔등신 미인이거나 조각 남일 때가 많다. 연적의 힘은 상상 이상으로 세다. 꺼져가던 불씨를 되살리고 고요한 감정을 들쑤셔서 격렬한 사랑으로 이끈다. 더디나 안정적으로 가고 있던 사랑의 페달을 자신도 모르게 가열 차게 밟고 만다.
연적이 촉매제가 되기도 하지만 애초에 사랑은 목숨을 걸어야 얻을 수 있는 고귀한 것이라 생각했다. 마음보다 몸이 먼저 다가가고 닿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갈급함이 서서히 나를 죽여도 당연하다 여기는 것. 서로에게 스며들어 새로운 인격체가 탄생하는 것이 사랑이라 말하면 너무 진부하다 할 것인가. 아무튼 자신을 계산하게 되면 사랑이 아니라 믿었다.
개인보다 집단의 삶이 더 중요한 시절에는 틈만 나면 나를 죽이는 데 힘을 쏟았다. 덕분에 자기 자신을 공동체의 운명에 따라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데 익숙했다. 고루한 환경이 시류에 타협하는 현명함을 선물처럼 주었다. 낮은 곳에 있는 나를 안쓰러워하지 않고 무심하게 바라보는 평정심도 키워 주었다. 덕분에 사랑을 할 때도 상대보다 낮은 자리에 앉아야 편안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상대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마음이 사랑이라 여겼다.
그의 열악한 배경이 사랑을 위협하면 그를 덜 사랑하는 속된 나의 사랑을 자책했다. 배경을 헤아리는 불순물이 화마처럼 끼어들어서 사랑의 순결한 결정체를 망가뜨린다고 믿었다. 그가 문제가 아니라 내 사랑이 부족해서 절단 나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랑은 그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이뤄가는 내 삶의 지난한 과정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사랑은 결이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자신을 온전히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더라도 자신을 지키는 것이 전제되어야 시작할 수 있다. 수십 년간 다듬어온 단단한 자신의 성을 사랑을 위해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다. 팽팽한 고무줄처럼 두 개의 성이 마주 보고 서 있고 비슷한 눈높이에서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사랑의 퇴적물도 쌓여간다. 한쪽이 기우뚱거리면 그들의 합의는 물거품이 된다. 자존을 짓밟는 행위는 사랑을 버려도 좋은 명분이 된다. 사랑의 방해꾼이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보인다. 어쩌면 자기 자신을 상대로 싸워야 하니 더욱 아픈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이겨야 사랑을 얻을 수 있다니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 말이다.
적당한 거리에 있기를 원하는 여자가 열정 남을 만나 속도에 엇박자가 나면 그녀도 어쩌지 못하고 이별을 선택한다. “네가 바짝 조여 앉으면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 내가 아닌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 그녀는 사랑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울먹인다.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나누고 적당히 사랑하기를 원한다. 나의 정체성에 변형을 가져오지 않는 적당한 곳에서 서로를 들여다보는 적당한 사랑.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되어 가는 과정이 사랑이라 생각했지만 요즘 사랑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기둥이 평행 선상에서 나란히 나아갈 때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라 말한다. 한쪽이 기울어지면 마음 한 편에 빗금이 가기 시작한다. 동등한 자격을 상실하는 신호이고 그것은 상대를 위해 나를 내어놓아야 하는 강요로 비친다. 복잡한 관계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그 자리를 뜨고 싶어 한다. 함께 해결할 방법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러한 일에 정열을 쏟고 싶지 않은 거다. 나는 나의 길을 가면 되고 그는 또 그의 인생을 살면 되는 것으로 가볍게 정리한다.
자신보다 더 귀한 대상이 생기면 무엇이 좋은가. 그를 위한 일이 내가 아파야 하는 일이라면 오래갈 수 없지 않은가. 한 번도 의심해보지 않은 사랑의 정의를 원점부터 다시 생각하는 요즘이다. 사랑의 위대함이니 고결함이니 하는 따위의 가치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믿음 소망 사랑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말하는 경전의 가르침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사랑은 이기적인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라 생각한다. 사랑을 할 수 있어 이타적인 삶이 가능하고 동물과 달리 월등한 인간계의 영역을 구축하여 의기양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위대한 단서가 단지 호르몬의 장난이라면 어쩌겠는가. 페닐에틸아민, 도파민, 옥시토신, 세로토닌의 분비로 일시적인 감정의 유희였다면? 페닐에틸아민의 분비로 단 2초면 사랑에 빠질 수 있다 하지 않던가. 술에 취하듯 사랑에 취한다. 영원히 지속되면 좋겠지만 2년이 채 안되어 현실로 돌아오고 만다는 사실이 정설이다. 밥 먹는 모습도 귀엽고 머리를 쓸어 올리는 모습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사랑은 생명력이 그토록 짧다는 의미이다. 몸이 먼저 달아올라 그를 만지고 싶고 그와 분리되면 죽을 것 같은 사랑이 호르몬의 장난이라면 얼마나 허망한가.
이렇듯 짓궂은 호르몬의 포로는 되고 싶지 않다는 선언으로 해석하니 단조로운 요즘 사랑의 생리를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끝까지 챙겨야 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라는 발견으로 합리적인 사랑을 한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어떤 것도 속되다 비난할 수 없다. 거푸집에 버려둔 자신이 나중에는 엄청난 부채감으로 자신을 괴롭혀온 경험을 우리는 선대로부터 얼마나 많이 보아왔는가. 자신과 화해해야 타인에게 집중할 수 있다. 원 없이 사랑할 수 있다. 마음보다 현실을 재단하는 치밀함이 보일 때는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오래 사랑하는 방법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