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에는 나 자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더 귀 기울이고 신경 썼다.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까’, ‘이런 말을 하거나 행동하면 상대가 싫어하지 않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오랜 시간 살아왔다.
그렇게 살수록 내 인생에 ‘나 다움’은 점점 빛을 잃어갔다. 나답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고 시련이 있더라도 중심을 잘 지키고 살아기는 것이며, 삶을 대하는 나만의 자세가 있다는 것이고, 무언가를 고르는 취향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나다움을 잃게 되면 중심이 흔들려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기도 하고, 잘못된 선택과 실수를 하게 된다.
타인과 조화롭게 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내가’ 느끼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나다울 수 있어야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을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고 좋은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생기는 것 같다.
지금은 나를 갉아먹는 사람들은 걸러내고 꼭 곁에 둘만큼 나와 잘 맞는 사람들만 만난다. 인간관계의 폭이 좁아질지언정 내 행복은 보장되니까, 나답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난다.
30대가 되어 지난날을 돌아보니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과 멀어지게 된 이유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는 친구들과 행동반경이 비슷하고, 관심사도 비슷해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는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서기 때문에 점점 대화의 주제도 달라지고 관심사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친구 관계가 물갈이된다.
특히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해외에 가 꽤 오랜 기간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와 멀어졌다. 어떻게 하다 연락을 하지 않게 된 건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의외로 세계여행을 하며,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며 친해진 사람들이 있었고 그 관계가 오랜 기간 유지되고 있다. 성인이 된 이후에 만난 사람들 중 마음에 맞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들이 나이가 많든, 많든 친구 같은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한다.
임신한 직장 동료와 최근에 인간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결혼하고 임신하면서 친구들이랑 대화 주제가 많이 바뀌었어요. 저는 육아에 관심이 많은데 친구들은 미혼이다 보니까 커리어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그리고 저는 20대 때는 특히 사람을 좋아해서 관계에 되게 목맸었어요. 그런데 그런 게 정말 부질없더라고요."
...
"집에 가면 내 편 한 명이 있는데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어요."
즉, 인간관계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소홀해지는 게 당연하다. 결국에는 깊은 관계들은 소수만 남게 되는데, 그 관계들과 견고하다면 인생을 사는 데 충분히 행복하다. 이런 말들은 인간관계를 다룬 유튜브에서 지루하게 많이 들어본 말인데 30대가 되고 나니 피부로 더 와닿는 느낌이다.
이십 대 때는 일상이 지겹고 힘들었던 것 같다. 이십 대 초반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면 나는 돌아가고 싶지 않달까. 그 당시엔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느끼고 싶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 달아나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집은 안전한 곳이 아니었고 먹고살기 바쁜 가정이 대개 그렇듯 가족은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새로운 공간, 새로운 경험, 새로운 언어, 새로운 사람들을 좇다 보니 일상에서 균형 있는 삶을 사는 것에는 어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이십 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가만히 집에 앉아 고요히 나만의 시간을 보내는 걸 잘하지 못했다.
열심히 놀고 열심히 방황하고 난 후, 일상에서의 평범한 삶이 나를 얼마나 안정감 있고 편안하게 만들어주는지를 알게 되었달까. 자연스럽게 나이가 듦으로써 안정감을 추구하게 되는 것도 한몫할 것이다. 꼭 어디를 멀리 떠나지 않아도 친구와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가 개봉하면 영화관에 달려가고, 자신 있는 요리를 주변 사람들에게 선보이고,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 성과를 내거나 인정받고, 운동을 마치고 집 가는 길에 스치는 바람에 괜히 기분 좋아지고, 퇴근길 마주한 노을에 가슴이 몽글몽글해지고, 애인이나 배우자와 만나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며 서로를 위해주는 그런 삶. 너무나 사소한 그런 일상을 잘 살아내는 삶이 지금은 좋다.
이십 대와 별반 다를 게 없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데 있어 조금 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게 되고, 취향이라는 게 생기는 게 30대인 것 같다. 게다가 누가 나를 좀 싫어하더라도 그러려니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어렸을 때라면 상처받았을 일들에 일희일비하는 횟수가 적어진다. 조금 더 단단해지는 어른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이 시간이 지나가고 사십 대, 오십 대가 되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무척 궁금해지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