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집중하기
새해가 밝았다. 길고 푸석한 머리카락도 잘라냈고, 좋아하는 친구들도 만났다. 새해에는 힘든 마음들을 좀 덜어내고 즐겁게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변 사람들도 잘 챙기고, 운동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다니며 나를 가꾸는 소중한 시간을 가지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애인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쏟아지는 일거리, 운동, 친구들과의 만남, 가족들과의 약속 등으로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이별했다는 사실을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잘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면서도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에는 밖에 나가 바람 쐬는 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을 보거나, 열심히 유튜브 영상을 살펴봤다. 포근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재미있는 프로그램들을 보다 보면 외면해 온 고통들이 잠시 모습을 감추니까 자꾸만 자꾸만 영상을 찾게 됐다. 바쁘게 지내며 속내를 모른척 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면서 감정을 외면했다.
며칠 전 눈이 소복이 쌓인 날, 나무 위에 쌓인 눈들이 너무 예뻐서 영상도 찍고 사진도 찍으며 좋아했다. 부산에 살 때는 눈 내리는 걸 본 적이 없었던 터라 내심 반가웠다. 그렇게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걸 보며 전 남자친구와 제주도를 길게 여행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영실을 오르겠다며 폭설이 멈추고 등반이 가능해지기만을 기다리던 순간, 같이 낑낑대며 올라프 눈사람을 만들던 순간, 비닐봉지를 깔고 눈썰매를 타던 순간과 같은 추억들이 몽글몽글 솟아났다.
'아 그때 정말 좋았지. 오빠는 잘 지내려나.'
좋은 추억들이 너무 선명해서 눈에 눈물이 고일 것 같았다. 하늘에 별을 봐도 그가 생각이 나고, 하얀 눈이 내려도, 함께 자주 들었던 노래가 길거리에 흘러나와도 생각났다. 그리운 마음과 추억들을 외면만 하다가 그렇게 생각하게 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전 남자친구를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려면 외면할 게 아니라 자꾸 떠올리며 슬퍼하고 아파하고 그런 마음들을 계속 어루만져 줬어야 했던 거구나 싶었다.
그러다 전 남자친구의 인스타그램의 스토리를 보게 됐다. 해외여행을 가서 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은 꿈에 그가 나왔다. 꿈에서는 그가 해외 출장을 갔다는 내용이 나오기까지 했다. 도대체 어딜 갔을까 궁금해져 다시 업로드가 된 스토리를 훔쳐봤다. 동남아시아나, 발리? 같은 곳에 여행을 간 게 확실해 보였다.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신경 쓰일게 뻔하니까. 내 마음을 잘 추스르고 돌봐주기만 해도 벅찬데, 결국 궁금증을 못 이겨 스토리를 봐버렸다. 열심히 놀고 술 먹고 즐기는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온몸이 뜨거워졌다. 눈을 보며 그와의 따뜻한 추억을 떠올린 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발리를 간 건가? 내가 꼭 나랑 가자고 했던, 신혼여행으로 가면 좋겠다고 말했던 데가 발리였는데?'
'얄밉게 너무 잘 지내고 있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헤어졌는데 신경 쓰이게 팔로우는 왜 끊지 않냐는 친구의 말에도 꿋꿋이 말했었다. ”우리가 나쁘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나는 굳이 팔로우를 끊고 싶진 않아."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을 다시 주워 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그의 모습을 계속 보게 되면 힘들어지는 건 나 자신 뿐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아무리 우리 관계가 견고했더라도 헤어지면 깔끔하게 마음 정리를 하는 게 맞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부로 팔로우를 끊었다. 전 애인과 함께 종종 만나오던 오빠들과의 단체 카톡방도 나왔다.
보고싶고 궁금하지만 여기서 그만 멈추고 '나'의 마음에 집중해야 한다. 그걸 알면서도 계속 힘든 마음들을 들춰내지 않고 지냈던 나에게 사과하고 싶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그와의 기억이 흐릿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마음도 한결 편해진다. 글로써든, 말로써든 어딘가에 마음을 털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 더욱 명확해졌다.
힘들어도 쓰고, 슬퍼도 쓰면서 언젠가는 어지러운 마음이 편안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