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없는 크리스티너
따뜻한 시선을 가진 의학계의 시인 올리버 색스의 임상의학 역작
네이버 책정보에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뭔가 굉장히 어려운 책일 것 같다는 인상을 풍기는 소개다. '임상의학'이라니! 하지만 따뜻한 시선을 가진 신경학자의 글이라면 의심을 품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곧장 책을 집어 들었다. 아래 들어가는 글에는 그가 이 책을 쓴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나있다. 조금 난해할 수 있지만 내가 풀어서 쓴 글을 읽으면 쉽게 이해가 된다.
병력은 개인에 대해 그리고 그 개인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병력은 질병에 걸렸지만 그것을 이기려고 싸우는 당사자 그리고 그가 그 과정에서 겪는 경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전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좁은 의미의 '병력' 속에는 주체가 없다. 오늘날의 임상 보고에는 주체가 '삼염색체백색증에 걸린 21세 여성'과 같은 피상적인 문구 안에 넌지시 모습을 드러낼 뿐이다. 이런 식의 병력은 인간이 아니라 쥐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고 기록한 병력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주체 즉 고뇌하고 고통받고 병과 맞서 싸우는 주체를 중심에 놓기 위해서는 병력을 한 단계 파고들어 하나의 서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무엇이?'뿐만 아니라 '누가?'를 알게 된다. 병과 씨름하고 의사와 마주하는 살아 있는 인간, 현실적인 환자 개인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10-11p
병력의 사전적 의미는 '진단을 공식화하고 환자에게 의료를 제공하는데 도움을 줄 목적으로, 환자 또는 지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고 이를 토대로 의사가 제공하는 정보'이다. 쉽게 말해 그의 말은 병력의 어떠한 진단명이나 임상 보고는 본질적인 현상보다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현상에 더 집중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겉만 보고 환자를 판단하는 신경의학계를 비판하는 것 같다. ‘인간미'가 없다!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인간미 넘치는 임상체험을 글로 남기는 습관은 19세기에 이후 신경학이라는 객관적인 과학이 나타나며 쇠퇴하게 되었다'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글부터 뭐랄까 따뜻한 모닥불 앞에 앉아 차가워진 손발을 녹이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1부와 2부에는 뇌 기능의 결핍과 과잉에 초점이 맞춰진 글이 쓰여 있고, 3부와 4부에는 지적장애 환자들에게 발견되는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는 1부의 <몸이 없는 크리스티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몸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인지 제목부터 흥미로웠다.
크리스티너는 하키와 승마를 즐기는 다부진 체격을 가진 27세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누구라도 젊고 건강한 사람이라면 자신이 자신이 병에 걸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심한 복통 때문에 찾아간 병원에서는 쓸개돌이 있으니 쓸개 제거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수술 예정일 이전에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서 감염 예방을 위해 항생제를 투여받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크리스티너는 수술을 하기 전 날부터 이상한 꿈을 꾸더니 갑자기 발밑을 보지 않고는 서 있을 수도, 눈을 잠시라도 떼고는 뭔가를 들 수도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녀의 몸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검사 결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고유감각 전체가 손상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모든 고유감각을 잃어버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근육과 힘줄, 관절 어디에도 감각이 없어진 것이다. 그녀의 병명은 일종의 급성 다발 신경염으로 밝혀졌다.
고유감각이 도대체 뭐길래 크리스티너는 자신의 몸을 인식할 수 없었던 것일까. 우리의 몸에는 오감을 제외하고도 평형기관(전정계) 그리고 고유감각이 있다. 이 중에서 고유감각은 자신의 신체가 공간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감각, 즉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이다. 보통 사람의 몸은 자기 자신의 몸을 인식하기 위해 시각, 평형기관, 고유감각 이 세 가지가 모두 협조해서 기능을 한다. 다행히도 하나가 기능을 상실하면 나머지 두 개가 그것을 어느 정도 보충하거나 대신 기능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올리버 색스 박사는 크리스티너에게 시각이나 평형기관을 이용해서 고유감각을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른 선례를 들어 알려주었다.
크리스티너는 자신의 좌절스러운 상황을 빠르게 이해하고 판단했다.
"팔이 여기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은 하지만, 엉뚱한 곳에 가 있어요. 고유감각이라는 것은 몸에 달린 눈과 같은 것이어서 몸이 자기 자신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건가 보군요. 저처럼 그것이 없어져버리면 몸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겠지요? 몸속의 눈이 보지 못하면 몸이 자신을 보지 못할 테니까요. 그렇지요. 선생님? 그러니 이제는 몸에 달린 눈으로 봐야겠네요. 맞나요?"
그녀는 어떻게 그런 의지가 생겼을까 싶을 정도로 강한 정신력을 발휘했다. 천천히 자신의 절망스러운 상황을 극복해나갔다. 처음 한 달 동안은 몸을 움직이지 않았지만 3개월 후에는 침대 위에서 자신 있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갖은 노력을 해봐도 고유감각은 회복되지 않았다. 대신 다른 감각을 사용하는 법을 익힌 것이다. 몸을 움직이기 위해 몸의 각 부위를 눈으로 잘 보면서 어떻게 움직이는가 확인하고 점차 몸의 움직임을 의식적으로 조절해나가야 했다. 그렇게 크리스티너는 날이 갈수록 움직임을 더 잘 조절할 수 있게 되어 일상생활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몸이 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은 어떤 느낌일까. 내 육체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은 느낌으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 시각과 평형기관에 의지해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게 되다니.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근육과 힘줄 그리고 관절 등에서 일어나는 연속적이면서도 의식되지 않는 감각의 흐름 즉 제육감이라는 것이 있어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감각의 흐름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의식 중에 일어나기 때문에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몸속에서 일어는 감각을 너무도 당연하게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한 번도 내가 느끼는 감각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이고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앞서 말했지만, 올리버 색스 박사는 사람의 병력을 병력으로만 기록하지 않고 그들의 역사를 기록해냈다. 한 사람의 병력에 대해 이렇게 자세하게 서술해주니 이해도 잘 가고 이야기에 몰입하게 되었다. 딱딱한 지식, 논리적인 접근으로만 환자를 대하지 않는 그였기에, '무엇이'가 아니라 '누가'를 먼저 생각하는 의사였기에 이런 책도 써내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인간 존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정말 멋진 책이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덮는 날이 너무 빨리 오지는 않았으면 한다. 천천히 꼼꼼하게 읽어봐야 할 책이니까.
이제야 안 사실인데 올리버 색스는 뇌과학과 신경의학 분야에 대단한 발전을 가져온 세계적인 신경학자라고 한다. (나는 그걸 모르고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