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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진경 Sep 03. 2024

그댄 나의 위로다

나의 바다

누구에게나 위로받고 싶은 순간이 있을 것이다. 위로란 꼭 관계를 통해, 사람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음악, 장소, 향, 책, 쓰기, 날씨, 음식 등 각자에게 위로는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일 테지. 나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은 나의 배우자와 바다이다. 어떤 바다이든 관계없다. 나는 남해라는 섬마을에서 태어났다.


 흔히 남해가 동해 서해와 함께 남쪽의 바다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나라에는 '남해'라는 이름을 가진 섬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이 섬을 제1, 제2 남해 대교와 사천대교가 육지로 이어준다. 고향이 남해라고 말하면 흔히들 "남해 어디?"냐고 묻는다. 나는 "보물섬, 독일마을, 다랭이마을, 바다 아니고 섬"이라고 짤막하게 대답한다. "우리나라에 남해라는 이름의 섬이 있어. 제주도처럼. 네 번째로 큰 섬이야. 아니 왜, 다랭이 마을 있잖아, 독일마을도 유명하고, 죽방렴 멸치 들어봤지?"라는 말을 수십 번을 얘기하다 보니 갈수록 해시태그처럼 사람들을 빠르게 납득시킬 수 있는 키워드를 습득한 셈이다.


 그러나 사실 남해는 우리 가족에게 몇 가지 단어로 설명하고 끝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엄마와 아빠가 태어나고 자란 마을은 창선도와 남해도를 잇는 창선 다리를 지나는 자리에 위치한 삼동면에 나란히 있다. 나 또한 엄마와 아빠가 태어난 남해에서 태어났다. 나는 남해병원이 설립된 이래 처음으로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난 아기라고 한다.


 동네 어디에서도 바다가 보이는 전도마을에서 태어난 아빠는 수산업 고등학교를 나와서 항해사라는 직업을 갖고 더 넓은 바다로 나갔다. 내가 태어나던 날에 아빠는 먼 태평양 바다 위에 있었다고 한다. 넘실거리고 출렁거리는 바다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아빠는 육지에 내리면 멀미가 난다고 했다. 가족을 멀리 떨어뜨려 놓고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서 아빠는 가족과 육지를 그리워하다가도 육지에 내려오면 다시 남실대는 푸른 바다를 그리워하며 먼바다로 돌아갔다.


 엄마는 마을 입구로 나와야만 바다가 보이는 금송마을에서 태어났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부산에서 취직한 후에 아빠를 만나고 결혼을 했다. 그 후 나와 동생을 데리고 부산과 남해를 바지런히 오가며 살았다. 부산의 항구에서 아빠를 맞이하고, 남해에서 동생을 업고 내 손을 잡은 채 20분 거리의 친정과 시댁 사이의 바닷길을 걸어 다니며 우리를 키웠다.


 남해에서 할아버지는 종종 통통배에 나를 태워 마을의 앞바다로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두세 사람이 앉으면 꽉 차는 할아버지의 조그만 배는 바다의 작은 움직임에도 크게 동요하며 함께 출렁거렸다.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바다의 너울 위에서 조금씩 성장했다. 나는 바다에서 결코 멀미를 하는 일이 없다.


 가족이 그립고 바다도 그리운 아빠는 태평양을 떠나 남해의 바다로 다시 돌아왔다. 엄마와 아빠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남해에서도 가장 남쪽 마을인 미조리 초전마을, 바다 바로 앞의 이층 집을 구했다. 초천 마을의 바다는 해안선 끝이 한눈에 보이는 조그만 바다에 면해있다. 바다의 반대쪽으로는 왕벚나무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 벚꽃 잎이 하늘거리는 마을의 큰길에는 논밭을 따라 두세 갈래의 좁은 길이 바다를 향하고 있다. 그 길들이 하나로 모이는 끝에 우리 집이 있었다.


 여름이면 아침에 느지막이 눈을 떠서 엄마가 차려준 밥을 허둥지둥 먹고 대문을 뛰쳐나오면 바로 바다가 눈앞에 보였다. 뜨끈하게 덥혀진 몽돌을 밟고 서면 시원한 바닷물이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손을 더듬거리며 선착장에 붙어있는 조약돌만 한 참고둥을 따고, 바다에 둥둥 떠다니다가 밀려드는 파도에 몸을 맡기고 몽돌까지 떠밀려 오기를 수차례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동생과 나의 손과 발은 쭈글쭈글해졌다. 온몸이 벌게져서 돌아온 우리에게 엄마는 강판에 갈아둔 감자를 얼굴과 팔에 덕지덕지 붙여두고 우리가 잡아온 참고둥을 삶아주면 이쑤시개로 열심히 고둥을 뽑아 먹는 것이 매일의 일과였다.


 엄마는 그때를 지질하게 가난하고 초라한 시절이었다 말한다. 항해사가 본래의 직업인 아빠는 어부에는 소질이 없었다. 매일 바다에서 잡아 올린 해산물과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농사지은 작물들로 우리 가족이 굶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인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절 매일이 평화로웠다. 자연 안에서 언제나 충만했고, 세상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고 느꼈다. 노란 보름달이 떠오르는 날에는 검고 짙은 밤바다가 황금색으로 물들었고, 잠자리에 누우면 드나드는 바닷물 따라 몽돌이 차르르 차르르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말 그대로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였다. 동네에 사는 열명도 되지 않는 또래 아이들과 땀을 삐질 흘리며 벚꽃길과 바닷길을 가로지르며 뛰어다니다 보면 우리의 손과 머리에는 언제나 바다의 향이 났다.


 언젠가 새해가 밝기 전 새벽에, 아빠 배를 타고 우리 네 가족은 육지가 보이지 않는 먼바다로 나갔다. 그날따라 바다의 너울이 심해서 동생과 엄마는 멀미 때문에 조타실에 누워있었고, 멀미를 전혀 하지 않는 아빠와 나만이 배 위에 앉아 일출을 기다리며 롤러코스터처럼 출렁이는 파도를 느끼고 있었다. 불빛도 하나 보이지 않는 밤에는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보이지 않아서 우주 한가운데 둥둥 떠다니는 듯이 느껴진다. 동이 트지 않은 새벽하늘에는 별이 쏟아질듯하였다. 항해사 출신인 아빠는 별자리를 모두 꿰고 있었다. 그 시절만 하여도 지금과 같이 GPS 같은 기술이 보급되지 않은 때여서 아빠는 별자리를 보고 항로를 계산했다고 한다. 해가 떠오르길 기다리며 아빠는 별자리를 일러주며 우리가 출발한 육지로 가기 위해서는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통발을 내려 장어를 잡던 아빠의 배는 비릿하고 미끌거렸다. 한 겨울임에도 꿉꿉한 습기가 온몸을 축축하게 적셔왔다. 한참 후에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해가 떠오르기 전에 하늘이 먼저 밝아지는 줄 몰랐기에, 새해 첫 일출을 공쳤다고 생각하고 시무룩해진 나를 아빠가 불렀다. 저기 바다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다고. 바다와 하늘의 사이를 가르듯 해가 비집고 나타났다. 바다와 하늘이 붉게 물든 모습은 마치 데칼코마니를 찍어낸 것 같았다. 엄마와 동생을 급히 불러서 함께 그 신비한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남들은 갖지 못한 풍경 하나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게 되었다.

 

 엄마, 아빠, 그들의 부모님, 또 그 부모님의 부모님도 모두 바다에서 살아왔으므로, 엄마의 뱃속에서도, 할머니, 할아버지, 아빠의 손을 잡고 늘 바다를 보고, 바다에 뛰어든 나는 마치 몸 어딘가에도 바다가 흐르는 듯,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아도, 흘러가는 구름을 보아도 언제나 바다를 떠올렸다.


 잔잔한 바다,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끝없이 넓은 바다,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풍경, 사계절의 바다,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 억수 같이 내리는 비를 조용히 품고 사그라드는 바다, 새벽과 아침, 한낮과 한밤의 바다를 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레서 혜원의 엄마가 딸에게 쓴 편지에 이런 말이 있었다. '아빠가 영영 떠난 후에도 엄마가 서울로 다시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너를 이곳에 심고 뿌리내리게 하고 싶었어.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곳의 흙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내가 이 땅에 뿌리를 내려두었다는 안도감을 나도 알고 있다. 때로 도시의 소음, 교통체증, 꺼지지 않는 불빛, 흐릿한 밤하늘, 자동차와 기계들과 밀집한 사람들이 내뿜는 후덥한 공기 아래에서 감각이 둔해진다. 그러나 마음속 깊이 갯냄새, 파도 소리, 소슬한 바닷바람, 바다 위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기억하고 있으므로 나는 언제든 바다로 찾아가 위로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때고 바다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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