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안녕?’과 ‘안녕!' 사이에 있는 것들이다"
“지금처럼 항상 내 곁에 있어 줘”
사랑하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그렇게 말하기도 하죠. 짧은 행복이 너무나 애틋해서 그런 기약으로 연결해 가려 합니다. 역설적이게도 그 기약 안에는 어떤 식으로든 이별이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만해의 ‘임의 침묵’엔 이별은 만남과 한 짝으로 쓰여집니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이별은 만남이 시작되기도 전에 포연(砲煙)처럼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브금(BGM)으로 깔려 있습니다. 삶에서 이별의 의미를 처음 알게 된 이후로, 두통처럼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이별에 대해 저는 전혀 면역되어 있지 못합니다. 흔하디 흔한 이별 노래 가사들에 금세 눈시울이 촉촉해지고, 어떤 이른 아침 어머니를 생각하거나 언뜻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기라도 하면 콧날은 싸한 느낌으로 차오릅니다.
이별의 상념은 거의 매일 우리 곁을 스쳐가지만 그건 전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이 ‘평범한’ 이별은 앞으로도 갑작스럽게 혹은 염려했던 대로 저 문밖에서 노크를 하겠지만 저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못할 거예요. 혹시 그 이별에의 두려움에 대처하는 비결을 알고 계신가요?
Nothing lasts forever. Forever is a lie. All we have is what’s between hello& goodbye.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이란 말은 거짓말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안녕?(hello)’과 ‘안녕!(goodbye)’ 사이에 있는 것들이다.
‘영원’이란 시간은 우리가 그려보거나 가늠할 수 있는 범위를 크게 넘어섭니다. 우리가 가끔 이 단어를 사용한다 해도 보통은 그 단어의 원래 뜻을 의도한 건 아닐 겁니다. “널 영원히 사랑할 거야!”, “영원보다 더한 순간” … 강조나 수사(修辭)에 가까운 것이었겠죠. 무드 없게 그 단어를 쓰는 건 거짓말이라고 정색을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인간 수명의 잣대에서,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나든, 말하는 이나 듣는 이에게 ‘영원’이란 단어가 주는 느낌에 차이가 나기는 어렵습니다. 그건 해변에서 방금 집어 올린 모래 한 움큼 속 모래알 숫자 차이 정도일 테니까요. 영원이라는 모래사장에서 우리가 살아온 날들, 더 살게 될 것으로 기대하는 여명(餘命)은 계량할 가치가 크게는 없어 보입니다.
물론 위의 말의 의도는 그 ‘영원’이 아니라 ‘현재’에 맞추어져 있음을 압니다. 첫인사와 마지막 인사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 우리가 체감하고 우리의 선택과 결정 때문에 변화가 생기는 현재 삶 말입니다. 주말 커피집에서 만난 이상한 이웃, 뜻하게 않게 내가 한 말을 오해해 버린 오랜 친구, 출근길 문간에서 짧은 윙크로 변함없이 내 편에 서 있을 것임을 약속하는 아내와 함께하는 일상(日常)의 가치에 대한 것이지요.
성경 시편 90:12엔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법"을 가르쳐달라는 기도가 나옵니다. 여러분은 그 날들을 혹시 세어 보신 적이 있나요? 태어난 이후로 며칠이나 지나갔나요? ‘우리의 날을 세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옛날 할머니 댁 안방에 걸려 있던 일력(日曆) 한 장을 찢어내는 것보다 훨씬 묵직한 일인 건 분명합니다. 그건 ‘오늘’과 ‘내일’을 더 알차고 더 보람 있게, 좀 더 평화스럽게 사는 법을 찾아내는 것이며, 인생의 유쾌해 보이는 날보다는 문제 많고 짜증스러운 날을 수습해 가는 법을 알아내는 일일 겁니다. 갑작스러운 이별을 맞는 일을 포함해서요.*
커버 사진: After One Year (Kristian P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