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은 시작부터 말이 없었다.
공단의 골목은 녹슨 안개에 젖고,
벽보는 찢긴 채 바람에 나부꼈다.
우리는 단지 ‘오늘’이라 부르는
빈 종이 위를 걷고 있을 뿐,
누가 시작했고, 어디쯤 와 있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폐공장의 철문처럼 낡은 세계는
스스로의 힌지(hinge)를 삐걱이며,
조용히 부서져 내려갔다.
한때 중심이라 불리던 좌표들은
지도 위에서 지워졌고,
그 자리엔 익명의 바람만 불었다.
사라져야 할 것들이 있다면
그건 이름을 붙이지 못한 채
어두운 창고에 쌓인 망설임들이리라.
숨죽인 채, 누군가의 기록에서
영영 누락될 상처들.
그러나, 폐허 위에도
누군가는 맨손으로 새벽을 짓는다.
등 뒤에 어둠이 덜컥 걸려 있어도,
손끝에 닿는 바람의 방향만으로
다음 세계의 윤곽을 가늠하려 한다.
희망이라 불리는 것들은
정확한 답이 아니라
끈질긴 질문으로 남는다.
절망은, 눈앞의 현실에
너무나 정교하게 적응한 논리이기에.
그러니 묻는다.
이 풍경 위에 드리운 그림자들이
단지 침묵의 부산물인지,
아니면 아직 말해지지 않은
다른 언어의 시작인지.
먼지 한 톨에 우주가 반사된다면,
이 불확실한 경계 위에서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스스로를 서사의 첫 행이라 부르며,
잊힌 언어의 파편들을 주워
다시 문장을 새긴다.
멈춰 선 시간이 아닌,
움직이게 할 시간을 선택하며.
바꾸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어둠의 가장자리에
불을 붙인다.
#眞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