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은 논리보다
선입견이 먼저 착석하는 공간이다.
개념은 완결되었으나,
현실은 아직 문장 밖에 있었다.
강단은 말을 시작했다.
문장은 유기적이었지만 어조는 탈정치적이었다.
“사회는 기능하고, 의미는 자율적으로 흐릅니다”
“제도는 균형을 추구하고, 행위는 기능을 향합니다 “
말은 명료했다.
그러나
그 명료함이 말하지 못하는 것,
그 침묵이 말보다 더 무거운 것—
단 아래의 누군가 물음을 던진다.
“기능은 누구의 기능입니까?
분화는 진화입니까, 분열입니까?
사회는 복원되었지만
삶은 파편으로만 남았습니다.”
“억압은 구조로,
의식은 이데올로기로 재생산됩니다.
헤게모니의 전장은 제도 바깥에도 존재합니다.”
이름들이 호명된다.
그람시, 풀란차스, 알튀세르.
“그건 구대륙에서 온, 기한 지난 사상들입니다.
설명하려는 가요, 고발하려는 가요?
이론은 검증 가능해야 하고
분노는 분석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도식들 사이로
두 개의 언어가 어긋난다.
하나는
안정과 균형, 제도적 진화의 언어,
다른 하나는
폭력과 분열, 누락된 주체들의 말들.
“여러분,
사회는 시스템입니다.
의미는 기능 속에서 생성되죠.
국가 또한 자율적 행위자이며,
갈등은 조정될 수 있는 자원입니다.”
그러자 단 아래 또 다른 누군가가 말한다.
“80년 5월 광주는 기능했습니까?
침묵은 조정 가능한 자원이었습니까?
국가는 자율적이었으나
시민은 언제나 타율적이었습니다.”
말들이 부딪힌다.
시스템 대 구조,
기능 대 폭력,
분화 대 단절,
예측 대 누락.
강의는 계속되지만
강의실은 더 이상 강단의 것이 아니다.
질서가 아니라 불협이,
도식이 아니라 균열이
사유와 논리를 잠식해 온다.
강단은 다시 말을 꺼낸다.
“이론은 세계를 단순화합니다.
그 단순화가 없이는
어떤 예측도, 개입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제 질문은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앎의 외부에서
언어의 균열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노트가 덮이고, 책장이 접힌다.
단 아래는 흩어지듯 나가고
강단에 선 이는 홀로 남는다.
칠판엔 지워지지 않은 질문이 남아 있다.
‘사회는 무엇의 기능인가?’
현실은 여전히,
이론의 질서와 그 너머의 파열 사이에서
자기만의 문장으로
고통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眞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