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잘 사는 진리 Apr 30. 2021

"서울 남자는 다르더라니까-"

엄마, 아빠, 남자친구, 나 졸업식 4자대면

 오래 사귄 남자친구를 부모님께 소개할 일이 상견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졸업식날 나의 졸업 만큼이나 신경 쓰였던 하나의 미션이 있었다면, 바로 엄마, 아빠, 남자친구의 4자대면이었다.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다같이 호텔 중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기로 한 그 시간이 참 걱정이었다. 남자친구는 나를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다정하지 않고 시크한 편인데다가 꼭 필요한 말만 촌철살인격으로 하는 편이다. 지하철에서 시비 거는 노인, 낙원상가에서 억지스러운 가격을 제시하는 상인 말고는 어른들과 대화하는 것을 본 적도 없었다. 엄마한테는 남자친구에 대해 조잘조잘 이야기를 해둬서 큰 걱정은 없었지만 이렇게 본격 대면을 하는 건 또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무뚝뚝하다는 경상도 사나이인 아빠랑은 도대체 어떤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심란했다. 나 역시 부모님 앞에서 팔불출로 굴 수도 없었고, 남자친구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졸업식날의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자면 졸업식 전날 있던 이야기를 좀 해야 한다. 우리 엄마는 내가 꾸미는 것도  못하고, 지하상가에서  옷을 사입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나는 ' 스타일을 차차 찾아가는 거지!'라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엄마 눈에 그게 마음에 들리가 없었다. 졸업식에 입을 옷을 사러 갔는데 엄마가 60 원짜리 블라우스를 사자고 해서 깜짝 놀랐다. 하늘하늘한 쉬폰 소재에 목부터 쇄골라인까지는 섬세한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고, 아래로는 주름이 우아하게 잡히는, 누가 봐도 예쁜 베이비핑크빛의 반팔 블라우스였다. 아무리 그래도 60 원이라니, 이게 맞는 일인가 싶어 툴툴댔더니 엄마가 말했다.

 "졸업식 같은 에라도 갖춰 입어야지. 이런  예쁘게  입으면 도대체 언제 예쁘게 입을래? 다른 사람(점원) 앞에서 엄마 민망하게 만들지 말고 ."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했는데, 나는  정도는 엄마한테 지는 편이라서 이날도 온갖 비싼 옷을  얻어 입었다. 물론 내가 지는 것의 대부분은 결국 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말이 없다. 나도 비싼 옷이 좋고 예쁘고 뭔가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엄마가 엄마를 위한 것에는 무척이나 아끼는 편이면서 나에게만 이렇게 비싼 옷들을 턱턱 사주는 것이 미안해서 이기고 싶었을 뿐이다.

 

 대망의 졸업식날, 교정에서 넷이 마주한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남자친구는 꽉찬 꽃다발을 안겨줬다. 나는 꽃이  손에 들어왔다가 시들어서 버려지는  아까워서  선물은 원하지 않는 편인데, 졸업식날 소중한 사람에게 꽃다발을 받는 것은 의미가 있겠다 싶어서   번만 사달라고 이야기했다. 평소에는 실용성이 전혀 없는 선물이라고 싫어하던 남자친구도 그날 만큼은 정성스레 포장된 완벽한 꽃다발을 선물해줬다. 선물 증정식이 끝나고 엄마, 아빠가 있는 앞에서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남자친구에게 엄마가 예쁜 옷을 사줬는데 어떠냐고 물어봤다.

 "입은 사람이 예쁘니까 당연히 예쁘지.  옷은 이게 포인트네."

 퍼프로 되어 있는 소매를 붙잡고 살랑살랑 흔들며 남자친구가 말했다. 솔직히 그날 밥을 먹으면서 무슨 맛으로 먹은 건지, 어떤 대화를 주고 받았는지 생각이 하나도  난다. 나를 믿는 건지, 결혼 얘기가 나오려면 멀었다 생각해서 크게 관심이 없는 건지, 엄마, 아빠도 남자친구에게 무리한 질문(이를테면, 졸업 이후에는   생각인가?) 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무사히 무난하게 지나갔다는 것만 기억이 난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남자친구는 그렇게 다정한 편도 아니고, 본인이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편이다. 그래서 혹시나 우리 부모님과의 만남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쓰는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비싼 브랜드의 셔츠도 하나 사입고, 머리도 예쁘게 단장하고 왔다.

 "나는 오빠가 신경    알았어."

 "당연히 신경 써야지. OO 부모님이신데."

 상투적인 걸 싫어하는 사람에게서 이렇게 상투적인 멘트가 나오다니, 기분 좋은 뻔함이었다.


 이후 명절에 엄마가 숙모들에게 그날의 에피소드를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확실히 서울 남자는 다르더라고. 옷의 포인트가 뭔지  알고 그걸 칭찬하더라니까. 우리 남편들 중에 누가 그런 칭찬을 하는 사람이 있나."

 서울 남자라서 그렇다기 보다는 남자친구가 그런 사람이긴 한데(사실 경기도남자이기도 하고), 엄마는 남자친구가 그런 말을 한다는  재밌었던  같다. 무뚝뚝한 아빠랑 지지고 볶으면서 사느라 그런 식의 디테일한 칭찬은  들어봤을 거다.  봐도 눈에 훤하지. 아마 그냥 예쁘다고만 했을 거다. 어쩌면 예쁘다는 말도 거의  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내가 옷을   펄쩍펄쩍 뛰다가 마지못해 응하고, 아빠도 딱히 엄마의 스타일링에 대한 공을 치하해주지 않아서 엄마가 속상할 뻔했는데, 남자친구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줘서 조금 기분이 나아졌던  같다.


 연애를 하면 할수록 신기한  투성이다. 새로운 환경에서 바라보니 새로운 장면이 발견된다. 연애 초반에는 상대방을  모르니까 상대방이 어떤 모습을 보이면 ' 사람에게 이런 면모가 있구나' 정도인데,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렇게 뒤통수를 맞고 '이런 모습이 있다고?'라는 생각이 들면신선한 느낌마저 든다. 그와 더불어 내 인생에 색다른 일들이 생기는 걸 목격하는 것도 즐겁다. 나라는 사람의 또 다른 모습인 엄마, 아빠에게 새로운 공기가 유입되는 것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나만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엄마, 아빠는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나무처럼 한결같은 존재였는데, 순간적으로 불어온 예상치 못한 바람에 더 뻣뻣해보인 거 같기도 하고, 나뭇잎을 흔드는 것 같기도 하고. 나의 긴장과 걱정을 보정해보면 졸업식 그날의 그 장면도 나름 풋-하고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 오는 것이라던데, 한 사람의 인생이 내게로 와서 우리의 인생이 생기는 걸 보면 사랑이라는 감정자체가 새삼스레 사랑스럽다.

 남자친구도 이런 심오한 세계를 느끼려나 몰라-




 

매거진의 이전글 때로는 기댈 줄 아는 것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