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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 사는 진리 May 31. 2021

팀장님도 상무님도 부하직원이었어!

부하직원 노릇에 끝이 있을까

 6시가 조금 넘은 시간, 팀장님이 나와 선임님께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내가 전무님한테 메신저를 드렸는데, 숫자 1이 안 떴어. 숫자 1이 떴다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숫자가 아예 뜨지도 않았단 건 나에게 뭔가 하실 말씀이 있는 거지?"

 나와 선임님은 웃었다.

 "팀장님도 그런 생각을 하시네요."

 "그럼! 나도 너희랑 똑같은 직장인인 걸!"

 팀장님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유쾌한 기분도 들고, 동질감도 들고(?), 생각나는 에피소드도 많은 월요일 퇴근 무렵이었다.


 우리 팀장님은 사실 다른 분들에 비하면 의전의 이응 자도 모르시는 분에 가깝다. 하지만 지금 우리 팀에 오기 전 지방에서 근무를 할 때는 어마어마한 분들이 많았다. 희한하게도 드라마에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조직의 옛문화가 많이 포착되었다. 회식을 자주한다든지, 언젠가 글에 썼던 것처럼 건배사를 준비해야 한다든지, 수많은 예행 연습까지 해가면서 의전을 해야 한다든지, 윗사람의 의중이 도대체 뭘까 헤아린다든지 하는 것들, 그리고 더 심한 것들이었다. 나와 가장 먼 부장님도, 나와 가장 가까운 대리님도 각자의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머리를 썼다. 그걸 보면서 든 생각은 '부하 직원 노릇에 끝이란 게 있을까'였다. 과장이 되어도 부장이 되어도 팀장이 되어도 상무나 전무가 되어도 모실 사람이 또 있으니 이 피라미드에서는 정점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윗사람에게 엄청난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난 재벌 n세가 아니기 때문에 회사를 쭉 다닌다는 가정하에 평생을 누군가의 부하직원으로 살아야 한다. 웁스.


 영업 현장에서 숱한 회식을 하면서 '윗사람 마음 읽기'를 우수하게 실천한 여러 에피소드를 들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 이야기들을 듣고 완전히 질려버렸다. 레전드로 남아 있는, 당사자면 자랑스레 꺼내놓는, 목격자면 경이롭다는 듯이 꺼내놓는 이야기 몇 개가 생각난다.


 A 전무님은 산 뷰가 환상적인 백숙집에 갔을 때 사전에 부하직원들을 다 끌고 가서 창문마다 습기방지제를 발라두셨다.

 B 상무님은 거래처 사장님들이 족히 50명은 되는 행사에서 사장님들이 신발을 못 찾으실까봐 부하직원들을 동원하여 사장님이 벗은 신발을 다 기억하게 해서 사장님들의 성함을 적은 라벨을 신발마다 붙여놓으셨다.

 C 부장님은 주말에 골프 회동을 하러 내려오시는 임원분에게 지역의 유명한 빵집에서 빵을 대접하고자 했던 팀장님의 지시로 꽉꽉 막힌 도로를 뚫고 겨우 갔더니 사장님 이미 떠나셨다며 타박을 들었다.

 D 팀장님은 치매로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거래처 사장님의 볼 일을 처리해주고 샤워까지 시켜주셨다.

 E 부장님은 숙소에 음료수가 꼭 갖춰져 있어야 하는 부사장님의 숙소에 음료수를 종류별로 채워놨다가 사전 협의를 놓쳐 호텔 측에서 음료수를 다 치워버린 바람에 팀장님한테 아주 탈탈 털렸다.


 사람 사이의 일이니 어느 정도는 당연한가 싶다가도 사람이 하는 건데 도대체 어디까지 필요한가 선을 그으려고 보면 모호하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적임과 내가 실행할 수 있는 정의로움 사이에서 고민을 하던 나는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고, 이것도 틀리고 저것도 틀리니 늘 그렇듯 내 마음이 닿는 데까지만 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숟가락, 젓가락 놔드리고, 주문 잘 받고, 문 열어 드리고, 열심히 장표 만들고. 그런 거나 잘해야지.


 아, 그리고 팀장님께 더더 잘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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