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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 사는 진리 Jan 17. 2022

불안하면 공부를 해

또 다시 나를 벼려야 했다

 입사를 한 지 1년쯤 지난 시점에 주식을 시작했다. 사실 그 전까지는 주식을 절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주변의 거의 유일한 부자 사장님이 삼성전자 주식을 사라고 말씀해주셔서 솔깃했다. 어디에선가 위기가 기회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돈도 얼마 없고 함부로 덤빈 것이다 보니 걱정이 돼서 딱 10주를 샀다(지금 생각해보면 귀엽다). 한편, 주식은 아니라고 그렇게 외치던 엄마도 주식을 시작했다. 그 맘 때쯤 엄마는 집에서 유튜브를 엄청나게 볼 때였기 때문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주식에 대한 영상을 대차게 접하면서 엄마의 생각도 많이 바뀐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엄마 생각이 맞는지, 내 생각이 맞는지 말다툼이 벌어진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한동안 나에게 이 주식을 사라, 이 주식을 팔아라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날렸다. 엄마는 한 번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기 때문에 주식에 관한 책과 영상을 거의 머리에 들이붓듯이 섭렵했다. 회사일이 고되다는 핑계로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고 삼성전자만 사둔 나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공부였다. 그러니 더 많이 배운 엄마가 나에게 잔소리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엄마는 내 돈을 엄마 돈 이상으로 가치 있게 생각했다. 그래서 잃지 않는 투자를 하길 바랐다. 나는 그저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나는 내 방식대로 할테니 엄마는 엄마의 투자를 하라고 했다. 그러면 엄마는 알겠다고 하다가 다음날이 되면 또 폭풍 메시지를 보냈다.


 그 당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당시 내가 속해있던 팀은 일주일에 서너 번씩 회식을 했다. 매일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귀가를 했다. 내가 하는 일은 재미가 없었다. 9시부터 6시까지 하는 일보다는 6시 이후에 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회식에 가서 막내로서 분위기를 띄우는 게 내 일이었다. 나는 일을 잘했을 때보다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췄을 때 더 칭찬을 받았다. 그런 일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범법행위도 아닌데, 시키는 대로 해야지. 할 때는 또 좋은 마음으로 열심히 임했다. 나를 딸처럼 여겨주시는 부장님들과도 친하게 어울렸다. 회사 생활이, 어쩌면 사회생활이 다 그런 건데 내가 잘 모르는 거라고 스스로를 단속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내가 꿈꾸던 내 모습과는 딴 판이라는 것이었다.


혼란스러웠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면 뭐든 될 거라고, 그렇게 하면 기다리던 미래가 올 거라고 굳게 믿었는데, 성인이 된 내가 여전히 완성이 되지 않고 헤매고 있다는 것에 화가 치밀었고, 사실은 방법도 모르면서 무식하게 시간만 들여 열심히 살았던 내 자신에게 실망했다. 그간 유지하고 있던 긍정은 무너졌다. 그 긍정은 내가 원하는 미래를 잘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였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매일매일 쫓아다니면서 열심히 살았나?'

 '아니, 애초에 내가 열심히 살긴 했나? 알맹이가 아닌 것들로 내 하루를 채우고서는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부하면서 사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왜 그동안의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가는 길에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지? 책상에 앉아 있는 것 말고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이 없지? 왜 다른 친구들처럼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라고 반항 한 번 해본 적이 없었을까?'


 사실 엄마가 주식을 이렇게 해보자, 저렇게 해보자 한 것은 결국 그런 나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가 한동안 그 어떤 보람도 느끼지 못하고 울적해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매일 엄마에게 내 울분을 옮겼기 때문이다. 나는 이따금씩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하다가 괜찮은 척하는 것에 실패하고 울었다. 나 왜 이렇게 사냐며, 정말 싫다며. 그렇다고 방법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서 더 싫다며. 그래서 엄마는 더욱더 열심히 공부했고, 엄마가 알게 된 것을 나에게 알려주고 싶어 했고, 엄마라도 잘해서 나를 생후 금수저로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엄마는 하루는 나를 위로하고, 하루는 나를 다그치고, 하루는 나를 차분히 설득했다. 나는 듣지 않았다. 더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갈 뿐이었다. 엄마의 위로에는 낮은 자존감을 드러냈고, 엄마의 꾸중에는 같잖은 반감을 드러냈다.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엄마는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불안하면 공부를 해."


 따갑진 않지만 날카로운 말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바람이 나를 지나치지 못하고 맴도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나는 나인데, 그래서 내 모습을 못 보는데, 왜인지 그때를 생각하면 내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을지 그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아직 너는 젊고 어려. 뭘 해도 할 수 있지. 그런데 지금의 너는 어떤데. 불안해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지 않겠어? 기회는 언제 어떻게 올지 몰라. 공부하면 준비할 수 있어. 불안하면 공부를 해."


맞다. 공부를 해야 한다. 어리석은 나는 이 세상을 백사장의 모래 한 알 만큼도 모르고선 징징대고 있었다. 무엇을 공부해야 할까.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 그동안 외면해왔던 돈에 대한 것들, 다시 꿈 꾸는 방법, ... 내가 공부해야 할 것은 차고 넘쳤다.


사람의 감정은 참 신기하다. 가장 쉬운 해결책조차 찾지 못하게 방해 하던 불안감이 말 한 마디에 감쪽같이 정돈이 된다. 이따금씩 엄마에게 억지를 부리던 나도 그 순간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시커먼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처음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눈을 깜빡여가며 하늘을 보고 있으면 보이지 않던 별이 잔잔하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다시 떠오를 해를 기다리듯이 두려운 마음은 사라지고 평온하게 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마치 마법처럼.


찾은 적 없던 자기계발서를 읽었다. 주식과 부동산에 대한 책도 조금씩 읽었다. 내가 막연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허상이었다. 심지어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허영이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서는 마음이 편해졌다.


 오은영 박사님이 사람은 제 잘난 맛에 산다고 했다. 불안을 이기는 방법은 자기 신뢰감과 확신이라는 것이다. 자기 신뢰감과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보니 공부 말고는 답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뭘 알아야 내 생각을 만들고 자신감을 갖는 거니까. 엄마는 나에게 가장 정답에 가까운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평소처럼 친구같은 엄마도, 언니같은 엄마도 아니었다. 딸 앞에 가장 지혜로운 이였다.


 그래도 독립에 대한 요구는 계속 되었다. 다만 억지를 부리진 않게 되었다. 공부를 해서 내 주관을 갖고 이야기했다. 엄마의 잔소리를 무조건 간섭으로 간주하지도 않았다. 엄마의 모든 말을 거부하는 것이 독립은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는 엄마의 이야기를 하고,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고, 엄마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다.  오늘도 엄마랑 투닥투닥 했다. 내가 엄마랑 하루에 통화를 2시간씩 하는 딸은 세상 천지에 몇 명 없을 거라고 생색을 냈다. 우리 모녀의 루틴이다.

 

나는, 다소 이기적이지만, 일단 나부터 잘 살기로 했다.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고 싶다는 마음은 나부터 바로 선 후에 다시 끄집어내기로 했다. 엄마가 먼저 그걸 원했다. 사실 내가 가장 독립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엄마도 사실은 나의 독립을 원하고 있었다.


엄마로부터 딸이 독립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엄마의 딸이기도 하고, 어린 엄마의 모습이기도 해서, 엄마가 나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엄마는 맨날 먹을 걸 사서 보내준다고 하고, 좋은 옷이나 물건도 하나 사주고 싶다고 한다. 그 전제가 '주식투자를 잘해서'인데, 시장이 영 모성애를 못 따라온다. 잔인한 녀석.


 내 감정을 설명하는 데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엄마라는 존재로부터의 독립은 어찌저찌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나도 나로, 엄마도 엄마로 홀로 설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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