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적 독립
언뜻 보면 웃기지만 자취와 주식투자는 우리 모녀에게 상당히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자취는 생활의 분리를 의미했고, 주식투자는 경제적 분리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생 때는 기숙사에 살았다. 기숙사에 사는 것은 언뜻 보면 부모와 물리적으로 떨어져 전혀 새로운 곳에 간 것이므로 독립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 경험상 기숙사에 사는 것으로는 독립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때의 나는 '학생'이라는 신분을 여전히 갖고 있는 어른아이의 상태, 어쩌면 고등학생 때보다 더 어리숙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필요한 게 있으면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해결을 했고, 기숙사 방에는 이미 학교가 제공하고 있는 가구가 있어 이불과 책상 위의 간단한 소품 말고는 내 것을 둘 만한 게 없었다.
취업을 하고 진짜로 자취를 하게 되면서 엄마와 갈등이 불거졌다. 자취는 지금까지의 생활과 완벽하게 달랐다. 우리 엄마는 하나뿐인 딸내미 머리 복잡하게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지내라고 침대도, 옷장도, 책상도 다 골라줬고, 결제도 다 해주었다. 그런데 나는 짜증을 냈다. 나는 내게 필요한 것을 내가 고르고 내가 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내가 타지에서 신입사원 연수를 받고 있을 때라 신경을 쓸 겨를이 별로 없는 시기였다. 그렇지만 며칠 집이 집 답지 않아도 좋고 옷은 아무데나 널브러져 있어도 좋으니, 내가 고른 가구나 물건이 집에 들어갔으면 했다. 그래서 내가 선택을 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엄마와 싸웠다.
"엄마! 나도 내 맘대로 좀 해보자! 자취방 하나를 내 맘대로 못하는 게 말이 되냐고! 침대도 엄마가 고른 거! 옷장도 엄마가 고른 거! 책상도!"
"아니, 이상한 거 사줬냐? 이쁘고 깔끔한 걸로 잘 사줬잖아! 그럼 됐지! 네가 혼자서 사면 퍽이나 좋은 거 사겠다! 보는 눈도 없는데!"
"보는 눈이 없으니까 이것저것 직접 사보고 안목을 키워야지! 이렇게 엄마가 다 해주면 나는 도대체 언제 내가 원하는 걸 하고 살아? 뭐, 내 평생 엄마가 다 사주고 다 해줄 거야? 엄마는 엄마 집 꾸며~ 내 자취방은 내가 꾸밀 거얏!!!"
"하이고~ 신경 쓰고 돈 써줘도 다 소용없네! 어릴 때는 말 잘 듣더니 못돼졌어!"
못되어졌다는 말에 움찔했지만, 원하는 것을 사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착하다는 말을 더 이상 좋게 들을 수만은 없었다. 다 따져놓고 이제 와서 엄마 말을 곧이곧대로 잘 들으면 독립하고 싶은 마음을 반하는 것이라 불편했고, 못됐다는 말을 듣는 것은 또 그것대로 불편했다. 이러나저러나 불편하다면 내가 원하는 것 하나라도 해보고 불편해야지.
그런데 엄마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알았다. 네 말도 맞아. 직접 해봐야 뭐든 할 수 있게 되지. 다음부터는 간섭 안 할테니까 원하는 대로 해봐. 이것저것 사보고. 그것도 다 한 때야. 그래도 엄마는 너 좋은 거 해주고 싶어서 그랬던 거지, 다른 뜻은 없었어, 알지?"
아이참, 엄마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못된 딸은 못 되지 않는가.
"아, 아니... 알았어. 짜증내서 미안해, 엄마. 근데 나 엄마가 원하지 않는 행동은 할 수 있지만 내 자신에게 해로운 행동은 안 해. 나는 내 인생 살고, 엄마는 이제 엄마 인생 살고, 그냥 엄마랑 딸이랑 서로 응원하면서 각자 인생 살면 되지 않겠어?"
"... 아우, 몰라. 네 맘대로 해."
윤허라고 하기엔 애매한 허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