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의 함정
남자친구의 제자가 모의고사를 본 후 남자친구에게 인스타그램으로 디엠을 보냈다.
'컨디션이 안 좋은 탓을 할 순 없겠지만, 갑자기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실수도 제 실력이지만 선생님한테 배운 거 잘 써먹고 싶었는데 잘 안 됐어요.'
안타까웠다. 나 역시 꽤 많은 것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떻게 내 탓일까,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나는 본인 탓을 하는 남자친구의 제자가 사실은 그냥 남자친구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서 잠시 스스로를 불쌍해 보이게 표현한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실수도 실력이야', '결국은 다 내가 자초한 일이야', '누구를 탓하겠어, 다 내 잘못이지'라고 정리해버리는 습관이 들어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분명 내 탓이 아닌데 피해는 내가 보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은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그 자체가 본질이다. 그런데 결과가 분명 안 좋은 일에 대해 누굴 탓할 수는 없어서 결국은 내 탓으로 마무리를 한다. 그것의 부작용은 때로 무기력으로 나타난다. 애초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을 내 탓이라고 해버리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후회라는 감정과 행동은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지만 생산적이지는 않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탓이다? 생각을 미처 못한 탓이다? 그것은 사실 내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자책에 불과하다. 아마 그 상황 속에서의 나는 대체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후회를 하지만, 후회할 줄 알고 후회할 만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없다. 지나고 보면 내가 좀 더 공부할 수 있었을 것 같고, 좀 더 신경 쓸 수 있었을 것 같지만 정작 상황이 발생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딱히 이전과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소설 속이 아니라면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뿐더러 과거에 얽매여 있기에는 시간과 에너지가 아깝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과거로부터의 독립이 필요하다. 뒤를 돌아보며 문제를 빠르게 파악하고, 앞으로, 그리고 지금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면 된다. 때로는 상황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전달하는 것도 필요하다. 회사생활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생각보다 내 일에, 특히 회사 일 전반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꽤나 중요하다는 일을 하고 있어도 이에 대해 잘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뭔가 일이 잘못됐을 때 결국 내 탓이라고 하면, 진짜 내 탓이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들 역시 탓할 곳을 찾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책임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문제 발생의 원인과 해결의 정확한 포인트를 찾지 않고 내가 더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 탓을 하지 않는 것과 내 탓을 하는 것은 다르다. 남 탓은 미움과 원망이 되고, 내 탓은 우울과 자책이 된다. 누구를 탓할 필요는 없이, 그냥 일은 닥쳐오는 것이고, 나는 그 일들을 해나가다 보면 터널을 지나가 있다는 것을 알면 된다. 지난 일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다음도 있고, 그 다음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방법을 다르게 해보면 된다. 어려운 일이었으니 다음에는 다르게 해보겠다고 생각하면 된다. 비슷한 일이 닥쳐오면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면 된다.
내 발목을 붙잡은, 과거라는 손의 힘에서 벗어나 아킬레스 건을 덮어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