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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 사는 진리 May 09. 2022

주관을 가지겠다고 다짐한 충격적인 사건 세 가지

주관의 중요성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나의 인생에 가장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선생님 중 한 분이었다. 똑똑하고 다정하신 선생님의 칭찬을 받고 싶어 책도 열심히 읽고, 공부도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나더러 작가가 되라고 하셨다. 일기를 잘 쓰고 글을 잘 쓴다는 이유였다. 나는 마치 작가가 될 수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고, 수업 안에서 이루어지는 글짓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때는 <TV동화 행복한 세상>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사연을 받아서 그걸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송출해주는 방송이었다. 나는 거기에서 감명받은 이야기를 반 친구들에게 소개하곤 했다. 여러 이야기가 있었지만 '20억 년의 사랑'이라는 이야기를 가장 좋아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부모님이 이혼한 후 어른이 되어서도 방황을 하는 딸에게 그녀의 엄마가 돌멩이를 주면서 '이 돌은 20억 년이나 되는 돌이고, 내가 너를 포기하려면 그만큼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라고 말해주었고, 딸이 그날로 방황을 마쳤다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학급문고였나 나만의 책을 만들면서였나, 거기에 내용을 복사, 붙여 넣기 하듯 실었는데, 그걸 본 담임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OO이 생각이 들어가 있지 않아서 아쉽네."

그 사건이 얼마나 인상 깊었으면 아직도 일련의 일들이 기억에 남는 건지! 내가 쓰는 글에 나의 생각이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일기에 내 생각과 감정을 실었고, 아마도 선생님은 그게 재미있었던 모양이지만, 선생님이 나에게 글을 잘 쓴다고 해주는 포인트가 거기에 있었음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나에게 작가의 소양이 있다고 해주는 선생님과 주변 어른들의 눈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남이 해준 이야기를 소개하는 데에도 내 생각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소개하면 되는 게 아니었어?

그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나는 글을 쓰건 말을 하건 무조건 내 생각을 잘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내 생각을 말하는 게 또다시 어색해졌다. 사춘기여서 그런지 또래의 압박이 심해서 그런지 내가 하는 이야기를 틀렸다고 생각할까 봐, 누군가가 비웃을까 봐 걱정돼서 제대로 이야기를 못했던 때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질문과 건전한 비판이 있어야 할 대학 강의에서, 기자 간담회에서, 회의에서도 별다른 질문 없이 내 의견을 감추는 것에 급급한 어른 아이로 자랐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런 나에게 또 한 번 충격(?)을 준 사건이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 어느 대학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철학과 교수님이셨다. 교과서에 흔히 나오는 성선설과 성악설 중 어느 것이 맞는 건지를 토론하는 자리였다. 나는 성무선악설을 이야기했다. 인간이 선한지 악한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 인자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는 것과 같을 수 있어."

나름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을 잘 말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던 것은, 내 주장에는 어느 정도의 방향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야기는 회사원이 된 후다. 이번에는 유튜브로 어떤 교수님의 강의를 본 이야기이다. 교수님은 책을 많이 읽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책만 많이 읽는다면 나의 생각이 남의 생각에 지배당할 수 있고, 내 생각이 식민지화될 수 있다고 했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내 생각을 더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참 충격이었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많이 안 읽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독서의 핵심은 따로 있었구나. 물론 교수님 말씀의 의도가 책을 읽는 게 도움이 안 된다는 뜻도, 많이 읽는 게 좋지 않다는 뜻도 아니라는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다만 내 주관적인 생각이 중요한 것이었다. 독서왕은 다독왕이 아니라 독후감왕에게 더 자격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시간의 간극이 참 긴, 나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던 사건들을 거쳐, 지금의 나는 이야기를 듣거나 책을 읽으면 어떤 것을 내 것으로 만들지 고민하게 되었고, 괜히 한 번 비판의식을 갖고 생각해본다거나, 남에게 좋은 이야기를 소개해줄 때에도 내 경험과 생각으로 살을 덧붙이는 습관이 들었다. 설령 그것이 권위 있는 사람의 생각이어도 무비판적으로 흡수하지 않게 되었다. 적어도 내가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내 인생을 앞으로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이기에 이 사람이 주장하는 것에 동조하게 되는 건지를 인지하고 넘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주관을 만들고 그 주관을 잘 말하고, 내가 꾸린 주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쉽지 않을 때도 있지만 오들오들 떨면서도, 조심스럽게라도 내 의견을 잘 말하려고 하고 있다.


인생을 살면서 재미난 일이 참 많았는데 이런 것들이 선명하게 기억나는 걸 보면 주관이 있는 삶에 대한 동경이 있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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