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도 부캐가 필요해
나는 별다른 설정값이랄 게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보니 본캐와 부캐를 굳이 구분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본캐는 명확하게 회사원이고 부캐는 글을 쓰는 사람 정도이다. 본과 부로 구분하는 것이 이미 본분이 되어야 하는 것과 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이 나뉜다는 건데, 한 해가 넘도록 그걸 지속하다 보니 나의 본캐와 부캐가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부스트 업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원에게도 부캐는 필요하다. 깨어있는 시간 중 반 이상을 회사에서 보내지만, 주말까지 잘 활용하면 부캐를 유지하는 것에도 꽤 효율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다. 마냥 생산하는 삶만 사는 것은 아니다. 유튜브도 보고, 넷플릭스도 보고, 데이트도 하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나요, 팀장님?ㅎㅎ)고, 매일 블로그에 글을 쓰고, 일주일에 세 번 브런치 글을 업로드한다. 최근에는 출판을 경험하기도 했다. 대단한 업적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기특해할 정도는 된다.
본캐와 부캐의 밸런스를 잡으려면 경험상 아래의 조건들이 필요하다.
*주의!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니고 직장을 다니면서 글을 쓰는 정도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부캐로 활동할 시간이다. 쓸데없이 보냈던 시간을 끌어모으고 잠은 30분 정도만 줄여도(잠은 진짜 말도 안 되게 시간이 없을 때 최후의 선택이다) 2시간에서 3시간은 확보가 된다. 뭐가 쓸데없는 시간인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미라클 모닝을 하든, 약속을 줄이든, 유튜브를 끊든, 기존에 시간을 보내는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 뭉텅이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생각보다 여유롭게 써도 된다. 본캐와 부캐를 다 잘 운영해내려면 시간을 타이트하게 써야 할 것 같지만, 오히려 시간을 여유롭게 쓰는 작업이 필요하다. 시간을 타이트하게 쓰면 휩쓸리게 된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채로 해야 하는 것들만 나열하고 정신없이 보내다가 지쳐버리기 십상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느긋하게 목표나 계획을 세워본다든지, 명상을 하거나 빈 종이와 펜을 들고 뭘 하고 싶은지 구상을 한다.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해도 마찬가지다. 멍을 때리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야 새로운 생각이 깃들듯이, 일단은 마음을 먹고 자리에 앉아서 글을 쓰겠다, 그림을 그리겠다, 영상을 만들겠다 등의 생각을 갖고 시간을 보내면 된다.
본캐와 부캐가 공존하는 새로운 일상을 보통의 것으로 만든 다음 다시 뭔가를 추가하든지 조금 더 디테일한 활동을 하면 된다. 더 새로운 것, 더 많은 것을 해나가려면 새롭게 만든 일상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세 문장짜리 글을 일주일에 세 편 정도 쓰는 걸 습관으로 만들고, 그게 충분히 익숙해졌다 싶으면 다섯 문장짜리 글을 쓰거나 매일 글을 쓰는 걸로 바꿔보는 것이다.
회사 일과 글쓰기 외에도 나는 동적인 것, 정적인 것, 생산하는 것, 소비하는 것, 자기 계발적인 것, 투자에 관한 것, 노는 것을 골고루 하고 있다. 매번 앉아서 글을 쓰지만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것도 좋아하고, 그게 다시금 내가 글을 써내는 것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다양한 경로(?)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생각을 정리하고서 회사원이라는 본분으로 돌아오면 '참, 이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찡찡대고 있었나' 싶기도 하다.
회사를 다니는 것만 하던 때에는 반찬 없는 고봉밥을 우걱우걱 퍼먹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여러 활동들을 하면서 달라졌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나름대로 여러 가지 영양소가 있는 반찬이 되어주고 있어서 간이 척척 맞다. 여전히 내가 해보지 못한 것들이 많지만, 밍밍했던 일상이 조금 더 짭조름해진 느낌이랄까?
물론 어떤 하나의 활동에 애정을 주는 게 쉽지 않은 사람도 있다. 나도 원래 내가 그런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지만 막상 재미난 걸 찾고 나니 '내가 좋아하는 게 이거였구나, 그때의 나는 아직 나만의 것을 못 찾은 거였구나, 안 찾는 게 나은 것은 결코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깊숙이 빠져들 하나를, 또는 얕게 빠져들 두세 가지 활동을 찾는 것은 분명 의미가 있다.
사람은 너무 똑똑해서 무언가를 시작하기도 전에 걱정부터 하게 되어 있다. 온갖 실패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다 떠올리는 것이다. 그냥 멍청하게 시작하는 게 좋다. '아아! 안 해봐서 몰라, 난!'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겸손하게 굴고 싶다면 내가 실패할 시나리오보다 내가 안 해본 것에 대해 감히 단정 지을 수 없음을 떠올리는 게 낫다.
예를 들어, 나는 글을 쓰기 전에 '이걸 어떻게 꾸준하게 해?'라는 생각을 했다. 시작하기도 전에 나의 게으름이나 소재가 떨어질 걱정부터 한 것이다. 당연히 기우다. 하다 보면 글감이 더 생기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생긴다. 당연히 소재가 떨어질 때도 생긴다. 그러면 또 글감을 조달할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된다. 흥미를 느끼면 꾸준하게 하게 된다. 어떻게든 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그만큼 대단한 존재다.
본캐가 해야 하는 일 외에 할 일이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게 어떤 형태일 때 바람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이나 말, 그림, 사진, 춤 등 나의 생각을 표현하는 수단을 찾는 게 중요하다. 회사에는 기획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영업을 잘하는 사람이 있고, 마케팅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엑셀을 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파워포인트를 잘 다루는 사람이 있고, 워드를 잘 쓰는 사람이 있다. 그런 것처럼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잘 맞는 표현 수단이 있다.
남보다 잘할 필요도 없다. 내가 다른 것에 비해 좋아하는 것, 이것보다는 그것을 더 좋아한다, 그걸 더 잘한다, 하는 것을 찾으면 된다. 어차피 남보다 잘하는 걸 찾으려면 결론은 좌절밖에 없다.
그리고 그게 뭔지를 찾았다면, 어디엔가 기록을 해야 한다. 요즘은 나를 보여주고 나의 일상을 전시할 수 있는 방식이 많다. 나의 생각을 세상의 구석 어디에선가 펼쳐 내다 보면 그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다. 다른 사람들이 몰라줘도 나 혼자서 쿡쿡댈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는 날을 기대하면서 발전해나가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자기만족이 영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굳이 단속할 필요는 없다. 기록의 힘은 대단한 것이기 때문에 부지불식 간에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도 있고, 괜찮은 결과물을 낼 수도 있다.
나에게 가장 큰 보람을 주는 것은 의외로 꾸준함이다. 내가 낸 성과 역시도 꾸준함의 결과라는 것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꾸준함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꾸준히 하다 보면 그 자체만으로 작은 성공을 해낸 것이기 때문에 잔잔한 성취에의 중독에 빠지면 나만의 루틴이 생긴다.
꾸준함은 더 이상 길게 말할 게 없다. 뭘 하든 꾸준히 해야 한다.
나는 여러 가지를 시도해봤지만, 블로그와 브런치에 내 생각을 써내려 가는 게 가장 꾸준히 할 수 있는 것임을 확인했다. 인스타그램, 수익을 목적으로 한 블로그도 해봤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끌고 가려니 이게 맞는가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드는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보면 지친다.
인스타그램 키우기를 시도하면서 지쳐버린 마음이 다음 시도를 할 때에도 꽤나 영향을 줬다. 회사를 다니는 것 외의 모든 활동들이 '새로운 활동'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묶여버려서 새로운 활동 A를 실패했다면 B도 실패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기에게 맞는 채널이 있다. 그리고 그 채널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있다. 그걸 믿고 빠르게 시도해보고 빠르게 접고, 잘 맞는 것을 찾았다면 그것을 꾸준히 해나가면 된다.
하나의 활동에 에너지를 몰입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그 말도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나는 본캐의 일을 잘 챙길 때 부캐 활동도 행복했다. '떳떳함'이라는 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부캐가 잘 되면 본캐를 당장 그만둔다거나, 본캐가 삐걱대는 걸 신경 안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본캐의 일을 느슨하게 해도 되겠지만, 나는 그런 성격은 못되었다. 그냥 다 잘하고 싶은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회사에서도, 퇴근하고서도 힘껏 할 일을 했다.
어쨌든 내가 얻는 성과가 부캐보다 본캐일 때 더 크고 하루 중에 그 일을 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데다가 분량이 길기 때문에, 회사원이라는 본캐를 성실하게 소화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회사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다른 행동을 할 수는 없는 것이고 내 육신이 회사 책상 앞에 앉아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주말에 잠을 잘 자두고 먹는 것을 잘 챙겨 먹으면 체력 회복이 금방 되기 때문에 본캐나 부캐 둘 중 하나를 굳이 놓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저녁에 술 마시고 노는 것보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운동을 하는 게 훨씬 더 체력소모가 덜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출판을 준비하면서 혹시라도 회사에 내가 책을 냈다는 소문이 돌고, 책 내느라 일 못했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되려 출판을 준비하는 기간에 회사 일에 신경을 훨씬 더 많이 썼다. 결과적으로는 출판도 무사히 해냈고, 회사에서도 우수 사원으로 선정되었다.
부캐를 정말 사랑한다면, 유지해나가고 싶다면, 본캐를 잘 챙겨야 한다.
저도 부캐를 키워나가고 있는 입장이라 '이렇게 하면 무조건 성공한다'라고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부캐를 키워나가려는 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