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뿔싸! 속았다!
언제부터인가 수학 성적이 입시생으로서 또는 예비 사회인으로서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는 구구단을 넘어서 19x19단 같은 게 유행했다. 선행학습은 물론이다. 내 또래의 친구들은 학원을 다니면서 중학 수학을 배우곤 했다. 나는 선행학습을 하지도 않았고, 딱히 특정 과목을 좋아하는 것이 없이 모든 과목을 동등하게 대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국어 과목 중에 '읽기', 그리고 예체능 과목 중에 노래를 배우는 '즐거운 생활'을 가장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엄마가 말했다.
"진아, 수학도 재밌어!"
그전까지 내가 수학을 재미없어했는지, 성적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수학 공부에 흥미를 붙인 것은 엄마의 그 말을 들은 이후였다.
나는 수학을 곧 잘했다. 원래 잘할 재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엄마가 수학도 재밌다고 한 말이 나를 홀려버린 셈이다. 매일매일 한 챕터의 문제를 다 풀 때도 있었고, 한 자리에 앉아서 문제집 한 권을 다 풀 때까지 일어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내가 재밌어하니 엄마가 학원에도 보내줬다. 그때부터는 진도를 쭉쭉 빼서 선행학습도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 1학년 때는 교육청인지 시청에서 운영하는 영재반에도 들어갔다. 워낙 천재들이 많아서 올림피아드에 진출할 정도는 못 되었는데 수학경시대회에서도 괜찮은 성적을 거두곤 했다. 고등학교 때는 물리 시험에서 빵점을 맞고 물리를 공부해야 하는 게 너무너무 싫어서 인문계를 선택하긴 했지만(왜 그랬어...?) 수학은 항상 나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과목이었다. 그러나 어렸을 때 수학 영재였던 것은 그냥 기분 좋은 추억 정도로 남았고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다.
인생에 있어 수학의 쓸모에 대해 논하는 말들이 많다. '그거 졸업하고 수능 다 보고 쓸 데가 어딨냐' 이거다. 나는 쓸모를 따졌을 때 정말 쓸모 있는 게 세상에 얼마나 되나 싶다. 모든 게 쓸모가 있고 모든 게 쓸모가 없다. 수학을 배운 게 자칫 의미 없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나에게는 의미가 있었다. 삶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달까? 나의 성정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달까?
내가 수학을 좋아했던 건 명쾌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정답을 맞히는 것도 재밌었지만 그 길까지 가는 과정이 재밌었다. 엉덩이 무겁게 책상 앞에 앉아서 공식을 유도하고 증명하는 게 재밌었다. 빈 곳 하나 없이 풀이를 해나가는 게 흥미로웠다. 앞뒤 논리가 척척 맞아 들어가는 게 즐거웠다. 다 풀고 나서 '단, a=0일 때는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단서가 붙는 것조차 쿨해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수학을 공부하면서 새로운 공식이 나올 때마다 직접 유도를 해보면서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방식 정도는 익히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이렇게나 진심으로 수학의 쓸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조차 엄마가 건 '수학도 재밌다'라는 주문의 효력이 남아있기 때문인 거 같은데, 지금 생각해보면 수학에 흥미를 붙이게 하고자 뱉을 수 있는 하고 많은 말 중에 엄마가 선택한 문장이 '수학도 재밌어'라는 말인 게 재밌다.
'수학 공부 좀 해!'와 같은 강압적인 말을 통해 공부를 유도할 수도 있고, '수학 성적이 왜 이 모양이니?'처럼 수치심을 불러일으켜서 설욕을 위해 공부를 하게 할 수도 있고, '앞으로 성공하려면 수학을 잘해야 해'라며 도태되어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을 지워줄 수도 있는데, '수학도 재밌어!'라니.
수학'이' 재밌어, 수학'은' 재밌어도 아니고 '도'라는 조사를 쓴 것도 괜찮은 전략이었던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 다른 과목을 더 좋아하고 잘하는 현재 상태를 충분히 수용해주면서 내가 흥미를 느꼈으면 하는 과목으로 여분의 관심을 그리로 유도한 거니까. 엄마는 이후에도 나에게 뭔가 강제하는 것 없이 선택권과 여유를 주고서 스스로가 흥미를 느낄 때까지 기다리고, 흥미를 느끼지 않는 것을 굳이 강요하지 않았다(물론 주제에 따라 엄마가 나를 매섭게 혼낼 때도 있었고, 가끔은 왜 이런 걸 혼내나 싶은 것도 있긴 했다^^).
나도 참 단순하지, 엄마가 뱉은 그 여섯 음절에 수학에 매료되어 버렸다니. 이제 뭘 재밌다고 주문을 걸고 살아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