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때 들은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누구에게나 인상적인 사건, 인상적인 말 한마디가 있는 법이다. 나는 엄마가 나에게 '엄마는 우리 진이가 얌전하기보다는 활발하면 좋겠어'라고 이야기했던 게 그렇게 인상 깊게 남았다. 내가 8살 때의 일이었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나에 대한 평판을 흘러 들은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얌전한 것도 좋지만 활발했으면 좋겠다고. 얌전한 것, 활발한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나은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내가 활발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여자 애는 얌전한 게 좋고, 남자 애는 활발하면 좋다는 어른들의 생각과는 사뭇 다른 방향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생활에 적응한 이후로 나는 대체로 활발한 축에 속했다. 반장, 부반장을 도맡아 했고, 보통의 과목뿐만 아니라 예체능 과목에서도 1등을 하고 싶어서 안달 나 있는 편이었다(나댔구나^^). 수업 시간에 발표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손을 번쩍번쩍 들고 발표를 했고,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했던 보습학원에서 '선생님이 묻는 것에 대한 답을 알아도 빙그레 웃고만 있어라' 하고 가르쳐주면서부터 얌전한 모범생 코스프레를 했지만 나는 태어나길 활발한 성격으로 태어났다.
그래서일까, 나는 다른 아이들과의 대면이나 경쟁에서 한 번도 수줍게 응한 적이 없었다. 상대의 성별도, 나이도, 경험도 중요하지 않았다. 쎈캐니 걸크러쉬니 하는 것과 맥이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내가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노력으로 당당하게 나섰다. 당연히 매번 이기진 못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생물학적인 신체 조건으로 비벼야 하는 일이 아니라 끈기로, 노력으로 해낼 수 있는 것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기곤 했다.
엄마는 나에게 '여자 애가~' 하고 시작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엄마가 의도를 갖고 그랬는지 아무 생각이 없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엄마가 그런 제약을 두지 않은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었다. 나의 세대까지만 해도 딸보다는 아들을 더 아끼는 부모들이 있었고, 여자 애는 조신해야 하고, 여자 애는 얌전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부모들이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한 번도 나에게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어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호연지기를 가지라고 했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 자아실현을 하고 살아가라고 했다. 아빠도 그랬다. 엄마가 나를 낳은 후 친할머니가 아들을 점지해달라고 물을 떠놓고 기도를 드렸을 때 아빠는 할머니께 '자식은 하나로 충분하니 더 이상 기도를 드리지 말라'라고 말했다고 했다(그렇다고 할머니가 나를 아끼지 않으신 것은 아니다. 항상 나를 두고 양반이라며 나를 아껴주시고 기특해하시고 칭찬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다행히 나는 엄마, 아빠가 기대를 걸만한 근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타고난 기질이 아닐까 싶다. 나는 어린이 때부터 지는 걸 싫어했고, 뭐든지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4살인가 5살 때는 엄마가 낮잠을 자는 동안 어린이용 문제집 한 권을 다 풀었다. 젓가락질을 처음 배우던 날에는 왼쪽 접시에서 오른쪽 접시로 맛동산 과자를 쉼 없이 옮기는 연습을 해서 반에서 제일 젓가락질을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공기놀이를 처음 배우던 날에는 하룻밤을 꼬박 새워서 공기놀이로 학교와 학원을 평정했고, 2단 줄넘기를 하나도 못하다가도 뙤약볕에 체육복이 땀에 절어 짙은 색이 되도록 연습을 해서 수행평가 A의 기준이었던 15개를 해내고야 말았다. 체육 선생님이 질린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윗몸일으키기를 할 때면 온몸에 진이 빠지도록 몇십 개를 하고야 마는 나를 보고, 아빠는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런 성취의 경험은 내가 어떤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하도록 하는, 원하는 결과를 얻게 하고야 마는 장치가 되었다.
엄마는 항상 나에게 잘난 사람이 되라고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돈도 많이 벌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잘 살 수 있다고 했다. 배우자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잘 만나야 한다고도 이야기해줬지만, 내가 잘난 사람이 된다면 배우자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늘 겸손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했다. 엄마가 끊임없이 주입해준 것들은 알게 모르게 나의 태도를 형성해서 엄마가 주술을 건 대로 나는 당당함을 잃은 적 없이, 주눅 들 수도 있고 내가 못난 건가 생각해버릴 수도 있는 환경에서도 당당하게 살아올 수 있었다.
어린 자식에게는 부모가 곧 세상이다. 세상이 나에게 활발하고도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하는데, 내가 그것을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엄마, 아빠에게 얽힌 감정이 가끔은 슬프고, 가끔은 다루기가 어려워도, 결국 내 인생을 내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엄마, 아빠가 다져준 당당함은 시간과 돈을 들여도 바꾸기가 어려운 성정으로 자리 잡아버렸다.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만큼 소중한 교육이 있을까. 이거야말로 돈을 주고도 못 사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