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짜 잘 살고 있나 보다 느낄 때
언제 만난 친구인가에 따라 친구들의 성격이 확연히 구분된다. 고등학교 때 만난 친구들은 가만 보다 보면, 내가 얘네를 대학교를 다니거나 그 후에 만났으면 친해질 수 있었을까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그 다양성과 의외성 덕분에 그들과 노는 게 재미나기도 하고 낯선 감정을 느낄 때도 있다. 반면 대학교 때 만난 친구들은 나와 정말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다. 선비 기질이 있다거나, 스스로에 대해 약간의 강박을 갖고 있는 것, 주어진 길 위에서 늘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그런 것들에서 오는 다양한 성품과 기질들이 닮았다.
그중에 한 명은 1년 선배로 만난, 사실 빠른년생이어서 나와 생일이 4개월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언니다. 30살의 문턱에서 나랑 동갑이 되고 싶어 했지만, 한 번 언니를 어떻게 동갑으로 대할 수 있겠어! 하지만 언니는 언니미가 뿜뿜하는, 좋은 친구다. 언니는 늘 따듯하고 진솔하다. 언니는 몸이 상당히 마른 편인데, 보조개가 이쁘게 들어가고 눈빛이 부드럽게 빛난다. 그래서 가녀린 그 몸이, 튼튼한 나의 몸보다 더 단단하게 느껴지곤 한다. 진심 어린 눈빛을 받으며 진지하게 건네는 말들을 듣고 있자면, 내가 이렇게 좋은 친구를 뒀다니 잘 살아왔구나 싶다. 언니와 나는 학부생 연구 프로젝트도 함께 했고 학사 졸업 논문을 같이 썼다. 학교 생활, 인간관계, 연애상담까지, 서로에게 안 한 이야기 빼고는 다 한 사이이다. 언니는 프로젝트의 리더였는데, 언니가 리더가 아닌 상태를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리더의 역할을 잘해줬다. 모든 걸 꼼꼼히 챙기는 언니에게 그 자리는 상당한 스트레스였겠지만 팀원인 나는 그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지적할 것은 지적하고, 속상한 것은 속상하다고 말했던 언니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조심스럽고 정중했지만 거침없었다. 본받을 모습을 보여준 것은 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나에게 말했다.
"나는 '너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를 늘 생각하게 돼."
내 인생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칭찬 한 마디였다. 나는 힘이 들 때 항상 언니가 해준 그 말을 상기하곤 했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좋은 사람인 언니가 그렇게 이야기했잖아. 내가 겪는 문제의 답은 언제나 내 안에 있어'. 사실 동생에게 그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한다는 게 꽤 충격적이기도 했다. 사람이 얼마나 진솔하고 꾸밈없는 사람인가 싶어서.
언니와 나는 2020년 10월, 내가 부산에 살고 있을 때, 언니가 출장을 왔을 때 약속했다. 1년 후에 언니는 좋은 취미를 갖기로, 나는 글을 많이 많이 쓰기로.
"신기해. 너는 정말 그 약속을 지켰네?"
언니는 늘 대화를 하는 상대방에 대해 궁금해한다.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내가 하는 것들을 물어왔고, 가끔은 뜨끔할 정도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곤 했다. 나를 공격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궁금해서, 나의 동인이 뭔지 궁금해서 그런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 만났을 때는 내가 책을 낸 이야기, 온라인 강의 플랫폼 대표님과 미팅을 하고 온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언니가 말했다.
"넌 진짜 대단한 것 같아. 근데 나는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를 하면서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편인데, 이상하게 너한테는 샘이 하나도 안 난다? 나 너를 진짜 좋아하나 봐!"
하고는 해사하게 웃는다. 모르긴 몰라도 다른 사람에게도 샘을 내는 건 아닐 거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거겠지. 나 역시 언니에게만큼은 진심으로 응원하고 나의 모든 모습을 털어놓을 수 있기 때문에 언니의 말이 공감이 되기도 하고 행복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언니는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하는 말재주가 있다.
"나 네가 확실히 방향을 틀었다는 생각이 들어. 아직까지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간 건 아니지만, 10년 후의 너는 다른 곳으로 가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언니가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니 꼭 그렇게 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가 요즘 우울하고 힘이 빠진다기에 글을 써보는 건 어떠냐고 말했다.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걸 강요한다고 느낄까 봐 걱정이 되어서 단서 조항을 자꾸 붙이게 되었다. 말하다 보니 하고 싶은 말보다 단서 조항이 더 길었다.
"내가 아직 뭐 대단히 성공한 것도 아니고, 언니가 관심 없는 이야기인데 억지로 듣고 있을까 봐 걱정은 되지만, 언니 글을 써보면 어때?"
그랬더니 언니가 말했다.
"너 왜 자꾸 네가 한 게 대단하지 않다고 해! 대단해! 물론 이렇게 말하고는 있어도 그런 겸손한 모습 때문에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걸 수도 있지만 말이야."
언니는 나더러 내가 언니에게 귀인이라며 오늘 헤어지고 집에 가면 운동을 하고 일기도 쓸 거라고 했다.
언니는 알지 모르겠다. 언니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하루하루가 나에게는 더 멋진 내가 되고 싶어지는 원동력 이 된다는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남들에게 '나 이런 좋은 친구 있어요!' 자랑하고 싶을 만큼 본인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선한 언니가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예의 그 보조개를 보여주며 함께 저녁을 먹어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