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적분이 살면서 왜 필요해?"
미적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였다. 나 역시 미적분이 어디에 필요한지 알지 못했다. 내 삶에 쓰일지 안 쓰일지 모르지만, 일단 내게 주어진 일이고, 마침 재밌었다. 그래서 할 만했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진짜 공부와 가짜 공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 공부는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 그것을 활용하여 시험 문제를 푸는 것이 다였기 때문에, 주관을 갖고 분류를 한 다음, 논리를 펼칠 만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갔더니 비로소 고등학교 때 했던 공부는 가짜 공부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공부를 했었어야 하는 거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학 강의를 통해 배우는 공부가 진짜 공부라는 직감이 들었느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사회과학보다는 자연과학, 순수학문이라고 일컬어지는 학문을 전공해야 비로소 진짜 공부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과거 고등학생 때 했던 공부는 원래부터 가짜였는데 꾸역꾸역 한 거였고, 현재(대학교 재학 당시) 하는 공부는 어차피 가짜인데 또 꾸역꾸역 하고 있는, 이상한 상황이 펼쳐졌다(심지어 내 전공을 매우 좋아해서 60학점을 넘게 들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는 그마저도 다 헛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공부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가장 필요한 자원인 돈을 잘 몰랐다(지금도 잘 모른다). 하여튼 내가 했거나 하고 있는 것은 진짜 공부가 아닌 느낌이었다. 나는 고작 스물몇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삶의 방향성이 어느 정도 정해져 버린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대학생 때까지 옆을 둘러보지도 않고 무작정 달려오다가, 이제 좀 여유가 생겨서 옆을 둘러보니 여기는 정글. 길이 없는 밀림에 갇혀버린 느낌? 하는 수 없어 울며불며 달리다 보니 쫓아오는 하이에나도 없는데 내가 왜 이리 도망치고 있나 현타가 왔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배우고 익힌 것으로 근근이 살아갈 뿐, 새로운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나는 쫓길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앞서 나간다는 둥, 뒤처진다는 둥 하는 이야기는 결국 다른 사람에 비해, 시대의 흐름에 비해 공부가 잘 되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구분 짓게 된다. 공부하는 사람은 앞서 나간다. 늘 최전선에 있기 때문이다. 꼭 책을 통한 공부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람을 통해, 시장의 반응으로도 공부를 할 수 있다. 늘 새로운 것을 공부해야 한다. 다른 분야로 수평적인 확장을 하든, 한 분야에서 수직적인 확장을 하든.
지금까지 내가 했던 것 중에 공부라고 할 만한 건 뭐가 있을까? 지식은 모르겠다. 다 까먹었다. 다만 관점과 태도는 알게 모르게 익혀 온 게 분명하다. 세상에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생존을 위해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는 것, 싫어도 인내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 이기적인 세상에서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의외로 득이 될 때가 있다는 것, 생산자는 늘 소비자를 신경 써야 한다는 것, 뭐 그런 것들. 안다고 해서 무조건 지켜지지는 않아도 행동의 기준이 될 자잘한 것들이 퇴적물로 쌓여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한 지층이 되어간다.
뭔지도 모르고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시간이 나에게 무엇을 준 건지 한참 뒤에서야 깨달음으로써 또 하나 깨달은 것은,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것들 역시 언제 어떻게 나에게 도움이 되어 있을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만들어 갈 나를 믿고 현재에 충실한 것이 가장 효과적인 공부가 아닐지.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열심히 살아가는 게 답이 아닐지.
결론을 내리자면 공부는 공부다. ‘공부는 공부다’라는 믿음이다. 진짜와 가짜를 따질 것도 없고, 따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다. 어디에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나에게 남아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배우고 익혀 나가다 보면, 또 언젠가 멈춰서 돌아보는 날에 달라져있는 나를 보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