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에 살면서 느꼈던 것들
동네 정하기
부산 전셋집 2년 만기가 다가오던 2020년 12월 중순쯤 최종적으로 서울 발령 발표가 났습니다. 저는 서울행에 관한 언질이 있을 때부터 서울대입구역 근처 전월세 매물을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서울대입구역에 집을 구하려고 한 것은 그 일대를 잘 알기도 했고, 강남까지 통근을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학가이기 때문에 다른 곳에 비해 절대적인 월세 금액도 저렴한 편이었지요. 지옥철도 20분이면 끝났습니다. 물론 방의 크기는 작은 편이었지만, 침체되어 있지 않으면서 활기차고, 지저분하지 않은 분위기도 좋았습니다.
물론 회사 근처에 살면 좋지만, 강남의 오피스텔은 월세가 비싸기도 하고, 집으로서의 느낌보다는 잠만 자는 곳의 느낌이 강했습니다. 게다가 관리비는 20만 원 언저리로 높은 편이었습니다. 어플을 통해 매물을 확인하고 부동산 중개사무소에 연락했을 때는 전입신고가 안 된다고 하는 집도 많았습니다(*). 월세를 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입신고를 하고 싶다고 하면 월세가 10만 원 올라가고, 같은 건물이라도 남향이면 월세가 5~10만 원 더 올라가니, 원하는 예산 안에서 집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부동산 방문 전 원하는 집의 조건 전달하기
집을 구할 때에는 본인이 원하는 조건을 명확하게 정리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조건을 갖춘 집을 보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조건들 중에서도 우선순위를 정해 거기에 맞지 않는 집을 걸러내면 집을 구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부동산중개사나 직원들도 고객들이 하루, 이틀 전에 원하는 조건을 알려주면 그에 맞는 집들을 필터링해두고, 직접 사무실을 방문하면 골라둔 집을 보여주는 식으로 일을 진행합니다. 비슷한 구역을 커버하는 부동산중개소끼리는 매물 리스트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지역에서는 한 두 군데 정도와 연락을 하면 됩니다. 제가 원했던 조건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역에서 도보 10분 이내일 것
관리비 포함 월세가 60만 원 대일 것
전세자금 대출이 가능하다면 전세보증금은 1억 이내일 것
2층 이상일 것
집의 방향은 북향이 아닐 것
(선택) 욕심을 좀 더 내면 창 밖은 벽이 아니었으면 좋겠고,
(선택) 거의 불가능하겠지만 소음이 적은 편이었으면...
허위매물 주의보,
지방 사람은 스울에 집 구하기가 참 힘듭니다
마음 같아서는 서울에 며칠 묵으면서 집을 알아보고 싶지만 거기에 드는 교통비, 숙박비도 만만치 않은 데다가, 언제 방문하든, 며칠을 보든 구할 수 있는 집의 수준은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에 하루 정도만 날을 잡고 서울에 갔습니다. 서울에 가기 하루 전에 몇몇 부동산에 연락을 해뒀습니다. 신림-봉천 일대에 전셋집을 구한 경험이 있는 남자친구의 말로는 첫째, 부동산 어플에 나오는 매물은 모두 다 허위라고 했습니다. 둘째, 제가 원하는 조건들을 충족하는 집은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첫째, 지방에서 올라가서 집을 구해야 하는 사람으로서는 어플을 활용하는 것 말고는 딱히 대안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허위매물일지언정 비슷한 집이라도 구해주겠거니 생각하고 어플 속에서 주야장천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좋은 집을 원하는 것은 당연한 마음인데, 알아보기 전부터 자체적으로 살고 싶은 집의 조건을 필터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것만은 꼭 충족해야 한다는 우선순위만 잘 정해두면 됩니다. 남자친구가 경험을 기반으로 한 냉정한 경고를 해줘서 기대치는 많이 낮춘 상태였습니다.
인천에 계신 이모는 인천에 우리 집이 있으니 이모 댁에서 지내든지, 적어도 당분간은 인천에서 지내면서 천천히 집을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송도 근처인 이모 댁에서 강남까지는 환승 2번에 편도 1시간 50분 정도가 걸립니다. 부산 발령 전에 잠시 그렇게 본사로 출퇴근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사람이 많은 것, 일찍 일어나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저에게는 인고의 시간이었습니다. 기약 있는 새벽 5시 기상은 괜찮았지만, 기약 없는 편도 4시간은 싫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중시하는 사람인지라 가능하면 혼자 살고 싶었습니다. 시간의 문제일 뿐 어쨌든 집을 알아보긴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전세자금 대출이 가능한 전세는 없다
서울대입구역 근처의 B 공인중개사무소의 B 실장이 알아봐 준 집 중 하나에 대해 실제로 매물을 보지도 않고 원거리 전세 계약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소기업 청년 대출(이하 중기청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서 은행 전세 자금 대출을 받으려고 했더니 집주인이 부동산중개사를 통해 중기청 대출이 아닌 다른 대출은 안 된다고 말해왔습니다.
"중기청 대출과 은행 전세 자금 대출이 집주인 입장에서 별다른 차이가 있나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집주인께서 이상하게 고집을 부리시네요."
"보증보험은요?"
"이게 근생(근린생활시설)이라 보증보험은 안 돼요."
보증보험은 전세계약이 끝나면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전세보증금을 꼭 돌려받을 수 있도록 책임을 지는 보증상품입니다. '보험'이기 때문에 보증보험료를 내야 합니다. 그리고 주용도가 주거용이어야 하는 등 보증보험이 가능한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서울의 오피스텔은 주거용 오피스텔도 많지만 근린생활시설로 등록된 오피스텔도 많습니다. 근린생활시설은 보증보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보증보험이 불가능합니다(**).
"전세 자금 대출이 가능한 다른 전세가 있을까요?"
"거의 없다고 보시는 게 맞는 것 같아요."
부산 전세보증금은 어쩌고?
부산 전세를 빼고 나서 전세보증금이 있었지만, 온전히 내 돈 몇 천만 원을 맡겨놓고 불안해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부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안전한 장치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전세권 설정을 허락해주는 집주인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전세자금 대출은 보증금의 80~90%가 나오는데, 전세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제가 갖고 있는 현금을 더 많이 넣어야 했습니다. 더불어, 돌려받은 전세보증금은 예비로 묶어뒀다가 혹시라도 제가 거주할 수 있는 아파트를 살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잡아채는 데에 쓸 계획이었기 때문에 전세자금 대출이 안 되는 전세를 구할 유인은 전혀 없었습니다.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에 관리비를 포함한 월세에도 70만 원을 초과하는 돈을 지불할 용의는 없었습니다. 회사와 무척이나 가깝고 집의 상태가 훌륭하면 다시 생각해볼 일이지만, 몇 년 동안은 좋은 집에 거주하는 것을 잠시 접어두면서 현금흐름을 최대한 확보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면 월세로 알아봐 주세요. 내일 갈게요."
하늘을 내 방 삼으리
다음날 B 실장을 만났습니다. 서울대입구역, 봉천역 근처의 집을 몇 군데 돌아다녔지만 마음에 쏙 드는 곳은 없었습니다. 언덕 투성이에다가 건물은 다닥다닥 붙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좁았습니다. 대학이나 직장 때문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들이 많은 지역은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수요가 많은 것에 비해 공급은 적고 집의 수준도 하향 평준화되어있습니다. 부산에서는 꽤 넓은 집을 1억이 안 되는 전세 보증금으로 거주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서울에서는 동일 컨디션의 집을 구하기 위해서는 거의 2배에 달하는 전세 보증금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부산에 살면서 눈이 너무 높아졌고, 서울에서는 동일한 조건의 집에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세 군데 중 큰 결격사유가 없는 곳 한 군데를 골랐습니다. 그곳은 좁았지만 남향이었고, 창문 밖으로 바로 벽이 아니라 뻥 뚫려있어서 낭만이 있었어요. 등기를 확인했고, 융자 비율이 높지 않아 서류상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늘을 내 방 삼으리 생각하고 계약금을 걸었습니다.
이사일은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였습니다.
(*) 전입신고를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양도소득세 때문입니다. 임대사업자 등록 여부, 오피스텔의 취득가액, 오피스텔 소재 지역 등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오피스텔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해당 오피스텔을 주거용으로 신고하면 소유하고 있는 주택 수에 오피스텔이 포함되고, 그러면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하기 때문에 해주지 않으려는 사람이 종종 있는 것입니다. 전입신고를 할 거면 월세를 10만 원 더 내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본인이 부담해야 할 세금을 월세입자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전세자금 대출과 보증보험은 임차인의 재산 및 소득 현황, 대상 목적물(월셋집, 전셋집)의 취득가액과 용도 등에 따라 보증의 주체(한국주택금융공사(HF),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은행 등), 보증금 및 보증의 범위 다르기 때문에 부동산중개사와 은행원 상담을 진행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