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탈탈 털림
평소 1호선, 2호선을 이용합니다. 그 노선도 참 인류애의 상실부터 삶의 의미까지 넘나드는 번뇌로 가득 찬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 감정을 경신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콘퍼런스에 참여하느라 노량진 환승 9호선 급행을 이용했습니다.
노량진에서 타는 것부터가 문제입니다. 길게 늘어선 줄의 앞쪽에 있으면 오는 열차를 못 탈 거라는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뒷사람들이 밀어주거든요. ‘억!’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납니다. ‘아!’ 하고 원망 섞인 소리도 납니다. 크로스백을 메고 올 때도 있는데 오늘은 짐이 더 많아서 백팩을 메고 왔습니다. 잘한 선택입니다. 백팩을 앞으로 메고 있어서 장기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지하철에 탄 그 누구도 입 밖으로 말을 하지 않는데 모두가 온몸으로 무언가를 격하게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열차 안이 이미 꽉 차서 노량진 역에서 타는 사람이 많았는데도 반대편 문보다는 승차했던 문 가까이에 섰습니다. 역에 가까워질 때마다 잔잔한 스트레스가 몰려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더 탈까? 나도 이미 타있던 사람들에게 그런 스트레스를 줬겠지?
사람들이 주로 내리는 역이 아닌 역에서 내리는 사람은 고난을 겪습니다. 빽빽한 포도송이 가장 안쪽에 있던 포도알이 나오려면 앞을 막고 있던 포도알이 떨어져 나가거나 본인이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내릴게요~”
떨어져 줘야 할 포도알들은 다시 가지에 붙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섣불리 내리질 못합니다. 그래도 오늘 내리는 분은 ‘어이쿠 오늘도 쉽지 않네’ 하는 듯 웃고 계셨습니다.
다음 역에서 사람이 추가됩니다. 상체와 하체는 일직선으로 있질 못하고 서로 살짝 휘어있거나 돌아가 있습니다. 코어로 버텨야 합니다. 필라테스와 웨이트로 다져둔 코어가 이렇게 쓰이다니,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거죠?
선정릉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열차 내 공기가 순환됩니다. 폭풍 뒤 고요. 현타가 찾아옵니다.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재택근무가 가능한 회사에 다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침마다 지하철을 타는 몇십만의 사람들은 본격 투쟁을 하기 전부터 매일같이 투쟁을 하며 출근하고 있네요. 1호선부터 9호선까지, 어느 곳 하나 힘들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분명 어제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서 훨씬 일찍 나왔는데 1호선 영등포역 정차로 어제보다 20분 늦게 도착했습니다. 회사로 출근한 게 아니어서 다행이네요. 예상 시간 1시간이었는데 20분이면 변동성 30%입니다. 강연 듣다가 졸 것 같았습니다.
졸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