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긴, 죽여야지
남자친구에게 ‘내가 바퀴벌레가 되면 어쩔 거야?’ 하고 물었더니,
“어쩌긴, 죽여야지.”
하고 대답합니다. 제가 다시 묻습니다.
“모습만 바퀴벌레고 목소리나 이성적 사고는 나야. 그러면 어쩔 거야?”
“아... 바퀴는 극혐인데? 말하는 바퀴 더 징그럽지 않아? 상상해 봤어?”
‘그래도 죽일 거야‘를 최대한 배려 있게 말하네요.
지난 주말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습니다. 바퀴벌레 질문의 기원을 알기 위해 한 번 읽어봤어요. 소설 속 주인공 그레고르는 어느날 바퀴벌레로 변신합니다. 그레고르는 본디 가족에게 ‘쓸모’가 있는 존재입니다. 영업사원을 하면서 가족에게 돈을 가져다줬고, 집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동생의 음악적 재능까지 지원해 줄 생각을 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레고르가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현실은 일자리를 잃는 것입니다. 당연하죠. 바퀴벌레로 변했는데요. 사회적인 제약 다음에 찾아온 것은 가족과의 갈등입니다. 물론 그레고르는 방치되다시피 하는데, ‘저걸 어쩌나’ 하는 가족회의의 내용을 그레고르는 듣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초반에는 동생이 먹을 것을 챙겨주긴 합니다. 그러다가 점점 더 자리를 잃어가요. 사회를 잃고 자유를 잃고 가족을 잃습니다. 방의 물건들이 없어지다가 하숙생들이 불쾌감에 방세를 내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그레고르는 감금되고 결국 죽음에 이릅니다. 그레고르가 죽은 뒤 홀가분하게 휴가를 떠나는 가족의 모습은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하는 독자들에게 씁쓸함을 줍니다.
“내가 이 질문이 제기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거든. 근데 거기에서 바퀴벌레가 된 주인공이 원래 돈을 벌어온단 말이야. 근데 그게 안 되니까 서서히 외면받거든. ... 근데 그냥 오빠가 돈 벌어오면 되잖아.“
“그렇지 그런 측면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단 주의지.“
아, 재미없어.
그레고르는 사고만 사람인 바퀴벌레입니다. ‘어디까지가 남아 있으면 그레고르라고 인식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어요. 뇌만 남아도, 뇌와 목소리만 남아도 외양이 바퀴벌레인 저는 남자친구로부터 바퀴 취급을 받고 사망 각이에요. 그러면 바퀴벌레가 아니면 어떨까요? 귀여운 강아지였다면요.
“그러면 강아지로 바뀌면?”
“강아지는 귀엽지. 그럼 우리 꼬미(본인의 반려견)랑 같이 키울게.”
“그러면 아예 모르는 제3의 외양을 하게 되면 어떨까? 무섭거나 혐오스럽지 않은 모습이면?”
“인간은 낯선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더 무서울 듯?”
이거 뭐, 제가 이렇게까지 가정의 가정을 해가면서 사정해야 합니까? 관두기로 했습니다.
근데 사실 저도 남자친구가 바퀴벌레 되면 죽일 거예요. 제가 빌라 살면서 바선생을 딱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는데, 쿠팡에 아주 잘 드는, 그 대신 나까지 질식사할 것 같았던 약이 있더라고요. 그걸로 키이잇 죽일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만으로 의미가 있으나 실상 쟈스트(just) 존재만으로는 부모님 외 사회적 존재로부터 사랑받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바퀴벌레로 안 바뀔 거니까 살가운 답이 아니더라도 상처받지 말며, 스스로의 존엄을 위해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