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으면 돼
‘우물 안 개구리’라는 속담은 식견이 좁은 것을 문제 삼을 때 주로 쓰는 표현입니다.
재밌는 건 ‘우물 안 개구리’라는 표현은 철저히 우물 밖에 있는 개구리의 시선에서 서술된 거라는 사실입니다. 우물 안 세상이 전부인 줄 아는 우물 안의 개구리는 어차피 우물 밖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해요. 따라서 우물 밖을 나선 개구리만이 우물 안 개구리를 불쌍하게 생각할 뿐, 행복으로 따지자면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가 더 우위에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결국 선택의 문제가 됩니다. 지식이 많고 성장의 여지는 있지만 늘 나와 타인을 비교하게 되는 우물 밖 개구리와, 지식은 별로 없어도 내가 아는 단순한 세상에서 단순하고 때론 답답하게 살아가는 개구리. 그중 어떤 개구리가 되어야 하는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든 우물 밖 개구리든 그저 좋으면 됩니다. 행복하면 돼요.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면서요? 근데 저는 생존을 목적으로 행복이라는 수단을 가져야 한다면 행복을 마냥 수단이라고 칭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니까요. 우물 밖에서 말라죽지 않고, 우물 안에서 화병 걸려 죽지 않고, 우물 밖에서 성장하거나 우물 안에서 안정을 느끼거나. 그렇게 행복하게 생존하면 됩니다.
그러니 지금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너무 큰 세상을 탐하지는 않았나, 혹은 너무 현재에 매몰되어 있지는 않았나? 내가 몸 담은 이 우물은 나에게 맞는 것인가? 너무 크거나 작은 건 아닌가? 적당히 만족스럽고 적당히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는 우물 사이즈는 어느 정도인가?
우물 밖에 있는 개구리가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를,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가 우물 밖에 있는 개구리를 손가락질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각자의 삶을 살아나가는 거예요. 각자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디 늘 새롭고 짜릿하면서도 안정적이기도 한 우물 없나?’
최적의 우물을 찾아야 합니다. 앗, 결국 공부하고 경험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네요. 불안하면 쉴 때가 아니라 공부를 할 때라는 말이 떠오르는 밤입니다.
여러분의 우물은 어떤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