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을 맞이할 자격
평범한 회사원이 번아웃씩이나 맞이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대단한 것 같지도 않고, 이 정도의 일은 누구나 하는 거고, 나보다 더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불태워버렸다'라고 할 만큼 내가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기가 부끄러웠어요.
최근에 본 <EBS 다큐프라임 휴식의 기술-제1부 당신은 ‘일’이 아니다>에서는 미국 거대 기업 중 하나인 F사에 다니는 한국 분이 나옵니다. 그분은 남들이 탐낼 만한 경력을 갖고 계시지만 번아웃을 겪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라는 질문을 하게 된 순간이 번아웃이 온 순간이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역시 나는 번아웃의 자격이 없었던 거라고 생각했어요. 사연자분의 “이렇게 살아도 되나?”의 속뜻은 ’이렇게 일만 하며 살아도 되나?‘였지만, 저는 ‘이렇게 살다가 X 된다’의 의미를 가질 때가 많았거든요.
제가 사회에 나오고 처음으로 ‘이렇게 살아도 되나?’라고 생각한 후 고민 끝에 선택한 것은 기존의 일에 더해 다른 일을 더 많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신 제가 좋아하는 일들이었죠. 뭔가 새로운 일, 글을 쓰는 일, 좀 더 자유로운 일이요.
그러다가 정말로 번아웃이 왔습니다. 몸도 안 좋아졌고요. 그래도 이번에는 그럴 만했다 싶었습니다. 대단한 성과랄 것은 없었지만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하느라 번아웃을 느끼는 것이, 아무것도 안 하고 무력감을 느끼는 것보다 나았습니다. 무력감. 그러고 보니 회사원으로서의 자아만 갖고 있을 때 느낀 감정은 번아웃보다는 무력감에 가까운 것이었네요.
번아웃인지 무력감인지 하여튼 우리의 머릿속은 치열하게 돌아갑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내가 놓치고 있는 것들이 있지 않나? 사실 이 상태나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보다는, 내가 지금 챙겨야 할 것이 건강인지, 가족인지, 새로운 도전인지를 알아채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그게 바로 나를 위한 길이니까요. 머릿속에 소화 작업을 해야 합니다.
다큐에서는 ‘나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어라’는 메시지가 자주 등장합니다. 언젠가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즈상 수상자인 허준이 교수님의 서울대학교 졸업 축사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도 교수님이 ‘자신에게 친절하라’고 이야기를 하셨던 게 아직도 마음 깊이 남아 있습니다.
다큐에는 ‘마음 챙김’ 명상을 하는 사람, 책으로 치유받는 사람, 심지어는 아기 자세인 체로 보자기에 싸여 겨우 편한 잠을 자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솔직히 예전 같으면 ‘이렇게까지 해야 해?’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 못하겠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찾으려고 몸을 일으킨 사람을 어떻게 우습게 보겠어요.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들 아닐까요?
댓글창을 보니 많은 사람들이 번아웃을 겪었고, 겪고 있더라고요. 자신만의 방법으로 지나 보냈고, 또 맞이하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저는 도미노가 생각났습니다. 세로로 길게 서있는 도미노 사이사이에 도미노를 반듯이 눕혀 두곤 하잖아요. 그 덕에 한 번에 모든 게 0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다시 일어날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더 많은 도미노를 세울 용기가 납니다. 우리에게도 누운 도미노 하나씩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의 제가 부디 나에 대한 친절을 떠올리며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