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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 사는 진리 Feb 24. 2021

막내 전담 포토그래퍼

부장님, 주말, 등산 03

 부장님은 DSLR에 망원렌즈까지 갖고 와서 나를 찍어주겠다고 하셨다. 나는 해외여행에서야 체면의 굴레를 온전히 벗어던지고 뻔뻔해졌었지만 사진 찍히는 걸 잘 못하는 편이고 카메라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기 때문에 힘드실 것 같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부장님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끙... 부장님은 평소에도 열정적이고 실행력이 엄청나신 분인데, 나를 찍어주실 때도 엄청나셨다. 디렉팅을 하느라 신나셨던 것 같다.

 "저기 가서 서봐봐."
 "얼굴에 빛이 들어가게 좀만 더 왼쪽으로!"
 "좌불처럼 포즈를 해봐."
 "내가 여기서 찍을 테니까, 저-기 보이지? 저기 내려가서 포즈 좀 잡아봐."
 "저기 바위 위에 올라갈 수 있나?"
 "원래 사진은 500장 찍어서 한 장 나오면 잘한 거야."

 "저기 내려가서 망원경 보는 척 한 번 해봐."


 부장님 저... 등산을 하러 온 게 아니라 사진을 찍히러 온 건가요? 등산을 하는 게 취미가 아니다 보니 옷도 신발도 없어서 그냥 시커먼 노스페이스 플리스와 시커먼 아디다스 바지를 입고 갔는데, 자신감이 결여된 내가 그럴듯하게 모델 노릇을 하려니 조금은 힘들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부장님은 내 카카오톡 프로필 해외여행 사진들을 보시고 내가 얼마나 뻔뻔하게 잘할 거라 생각하셨을까 싶다. 기대하셨다면 죄송하고 그 사진들은 다른 자아가 발현된 것입니다, 부장님.

 "부장님, 사모님은 사진 찍는 거 좋아하세요?"
 부장님은 시무룩해하셨다.
 "아니, 별로 안 좋아해. 내가 맨날 '저기 서봐라 찍어줄게' 하고 찍어주면 왜 이렇게 못 나왔냐고 뭐라 해. 나는 예쁜 거 같은데 자기 맘에 안 든다고 찍지 말래."
 "아들들은요?"
 "걔네도 싫어해."

 평소에 사모님, 아들들 이야기도 많이 해주시고 사진도 자주 보여주셔서 그런지 뭔가 상상이 되어서 쿡쿡 즐겁고 흐뭇한 웃음이 났다.

 부장님은 부장님이 모델이 되실 때 카메라를 소품으로 아주 잘 활용하셨는데, 먼 곳을 찍고 있는 도중에 찍힌 콘셉트로 멋지게 잘 나왔다. 그런 사진들은 당연히 내 폰으로 찍어드렸는데,
 "아니, 이거 비싸고 무거운 카메라보다 아이폰이 더 좋네!"
하며 허탈해하셨다. 그래도 역시 좋은 카메라는 다르다. 내려와서 받은 사진은 마음에 드는 게 꽤 많았다. 그 순간을 충분히 즐기고 있음이 잘 드러나는 사진들이었다. 나는 그 순간, 그 장소에 정말 내가 흠뻑 빠져있었다는 느낌을 주는 사진이 좋다. 부장님께 감사 메시지를 보냈다.


 "부장님, 저는 제 모습이 마음에 안 들까 봐 걱정했는데 열심히 찍어주신 덕분에 마음에 드는 사진이 꽤 많아요ㅎㅎㅎ 정말 감사합니다."

 "1장이면 고맙고, 2장이면 행운이고, 3장이면 행복이지. 매년 10장씩만 추억에 저장해놓으면 네가 내 나이쯤 되면 250장이 되니까 그때 앨범 하나 냅시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있어야 할 텐데."

 개인적으로 2020년 가장 따뜻한 대화였다고 생각한다. 부장님 말씀의 킬링 포인트를 꼽자면 마음에 드는 사진이 2장일 때가 행운이고 3장 이상일 때면 행복이라고 하신 거다. 반대가 아니라. 행복이 더 멋지고 더 큰 거다. 내가 부장님을 존경하는 이유랄까-

 내려와서 국수랑 파전을 먹는데 부장님이 카메라를 하루 종일 들었더니 손이 오들오들 떨린다면서 젓가락질을 못하셔서 죄송하고 감사한데 너무 웃겼다. 남 부장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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