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방네 자랑하고픈 팀장님
오후 6시 17분, 빨리 퇴청하지 않고 가만히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나를 보며 팀장님이 말을 거셨다.
"그렇게 할 일이 많아?"
"조직문화 활동 준비하는데요!"
팀장님의 어이없고 유쾌한 웃음이 따라온다.
"너 그거 할 때만 야근하는 거 내가 다 알아. 다른 일이 부족하지, 아주?"
"다른 일은 일과 시간에 하고, 이거는 이렇게 퇴근 시간 후에 짬을 내서 하는 거죠, 팀장님."
"너... 아주 조직문화 활동할 때만 신나 보여. 너 열심히 하지 마!"
조직문화활동은 나에게는 거의 게임을 만드는 것과 비슷한데, 이전에는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한다는 72문답을 갖고 와서 아주 즐겁게 서로의 성격과 취향을 공유했고, 이번에는 삼행시 백일장을 준비했다. 포스터도 열심히 그렸다. 지난번에는 팀장님을 비롯한 팀원들의 얼굴을 캐릭터 속에 집어넣어 팀 소개 배너를 만들었다. 우리 팀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 팀장님을 이런 유쾌한 패러디도 허락해주는 아주 유쾌한 분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암암. 그걸 만드는 동안 너무 재밌어서 어깨를 들썩이면서 작업을 했더니 그때도 열심히 하지 말고 얼른 집으로 사라지라고 하셨다.
"좀 재밌긴 해요. 크크크킄크크크크크크크킄"
"으휴, 그래. 저녁이나 먹고 집에 가자."
팀장님은 너를 누가 말리겠냐는 듯 웃으셨다.
사실 팀장님이 나에게 저녁을 먹자고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늘은 내가 담당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회의가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다소 복잡한 모습을 띠고 있다. 3~4년 후 완성을 목표로 작년에 1차적으로 마무리된 것인데, 워낙 어려운 작업이라 아직까지는 실제 업무에 적용하기가 어렵고, 성과에 대한 측정이 안 되는 상태인지라 기능상의 보수 작업을 해야 하는 상태로 해를 넘어왔다.
우리 팀은 올해 새로 생긴 TF이다. 다른 팀들이 하는 업무를 지원하면서, 그 업무들을 좀 더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가 그러한 성격을 갖고 있는 프로젝트이다 보니 우리 팀이 관여하게 되었고, 담당자는 나였다. 사실 이렇게 거대한 프로젝트에 대한 관리 경험이 없는 내가 이걸 맡는 게 맞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어쨌든 진행되어야 하는 프로젝트이고, 다양한 경로에서 언급이 되면서 빠르게 진행하라는 명이 들어온 상황이기도 했다. 게다가 개인적인 관심과 얕은 경험도 있는 업무였다. 그래서 회의를 진행하면서 프로젝트를 어떻게 보완해보면 좋을지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냈다. 순수한 의문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업무를 기획하고 실행하던 각각의 팀에서는 다르게 느낄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을 회의의 끄트머리에서야 깨달았다. 작년에는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도 않았던 팀이 들어와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원래 잘하려고 하고 있던 일을 마치 우리 팀이 와서 공을 가로채는 모양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업무를 실행하는 팀의 담당 책임님은 업무를 기획하는 팀과 우리 팀에서 본인들과 소통하는 창구를 통일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업무를 기획하는 팀의 책임님은 프로젝트 진행은 기획팀이 하고 윗선으로 전달하는 일은 우리 팀이 하면 곤란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책임님들은 모두 친절하신 분들이고, 우리 팀 사람들이 그럴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안다며 좋은 표현으로 이야기해주셨던 것이라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재된 메시지가 무디지는 않음을 눈치챘을 뿐이다.
사과를 드렸다. 내 의견은 개인적인 궁금증이었을 뿐이지, 어떤 의도가 있거나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은 아니라고. 주제넘게 행동한 것 같아 죄송하다고. 앞으로 진행할 일을 논의하고, 각 팀의 팀장들이 다시 한번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하면 더 낫겠다는 의견을 주고받으며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눈치가 있는 편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회사의 눈치는 또 결이 다르다. 팀의 구성부터 장표의 표현 하나까지 작은 것 하나하나가 정치적 선언이 되는 일이,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늘 발생한다. 나도 어느 순간 그 행위에 에너지를 보태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고. 더군다나 우리 팀은 팀의 존재 이유와 역할과 업무 상 본의 아니게 그런 것에 종종 휘말릴 각이다. 회의를 다녀와서 팀장님께 이런이런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말씀드렸다. 팀장님은 상황을 정리해보면서 해당 팀의 팀장과 이야기 나눠보겠다고 말씀하셨다. 회의를 하고 나서 기분이 나빴던 건 분명 아닌데 보고를 다 드리고 나서 나도 모르게 멍하니 고개를 떨구고 있었나 보다. 팀장님은 나의 보고를 들으시며 그 내용을 아이패드에 유려하게 정리하고 계셨는데, 들고 계시던 하얀 애플 펜슬로 내 회색빛 맨투맨 소매를 툭 치면서,
"왜 그래." 하신다.
"아니, 뭐... 제가 뭣도 모르고 나댄 거 같아서요. 순수한 마음이었는데, 타 팀 입장에서는 그게 또 그렇게 보일 수도 있구나..."
"어쩔 수 없어. 앞으로도 우리 팀은 그런 일을 많이 겪게 될 거야."
"그럴 거 같아요. 근데 괜찮아요! 하다 보면 조정이 되지 않을까요?"
"그래, 하다 보면 되어 있을 거야. 너무 걱정 마."
그래도 팀장님은 신경이 쓰이셨던 거다, 저녁을 먹자고 하신 걸 보면. 팀원들에게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저녁을 먹이고 댁으로 돌아가시는 거 안다. 우리 팀원 모두가 안다. 미래를 그려보라는 취지로 만들어진 것 치고는 팀장 한 명에 팀원 4명으로 소박하게 시작한 우리 팀의 팀원 중 한 명을 갑작스레 다른 팀으로 떠나보냈을 때도, 사원 목표 수립과 관련해서 내가 가진 고민과 혼란을 털어놨을 때도 팀장님은 저녁을 제안하셨다. 팀원의 감정에 마음이 쓰여 저녁을 제안하시는 팀장님은 계실 수도 있지만, 팀장님처럼 군더더기 없이, 그러나 마음 깊이 위로해주시는 분은 글쎄.
누가 사람 때문에 회사를 다니는 건 멍청이나 하는 짓이라던데, 여기 있는 멍청이 한 명이 오늘도 멍청한 짓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