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고쳐야 할 문장들
마흔을 앞두고 마흔을 상상하니,
구도도 없거니와 초점마저 흐릿한
사진 한 장이 되더이다.
책 한 권이라도 사볼까 싶어
광활하기 이를 데 없는 광화문 책방에 갔더니,
골프, 등산, 낚시, 직장인 성공법, 부동산 투자법
따위만 눈에 띄더이다.
마흔에 다다라 마흔을 그려보니,
이번에는 차갑게 굳기만을 기다리는
슬픈 용광로 같더이다.
마흔, 그 즈음에 걸린 남자,
밀려드는 선택지들 가운데, 확신 하나 없이
두 눈 질끈 감고 골라내기 바쁜 자,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자들 앞에서,
그 자들 시선을 자기정체성으로 내면화하는 자[1],
자신을 향한 편견에 분노하면서도,
굳이 그걸 방패 삼아 안도하는 자,
이제야 제대로 사는 방법이 보이는데,
살아온 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자,
비교하지 않아도 불안하고,
비교하면 더욱 불안한 자,
몰라도 아는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어느 장단에 흔들어야 할 지 모르는 자,
용기와 객기가 헷갈리는 자,
잊고 파묻는 일에 도가 트기 시작하는 자,
지켜내야 할 보물이 많은 듯 싶어 흘끗 돌아봐도
막상 별 것이 없어 허망한 자,
그래서 여전히 불안한 자,
다가올 날을 걱정하느라,
더해 지난 날을 통곡하느라 지금을 잊은 자,
까닭 없이 숨기고 감춰야만 할 듯 싶은 자,
분명한 내 생각이
별안간 고집으로 둔갑해버리는 자,
결국,
밥 먹는 횟수만큼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를 묻는 자.
여기까지 쓰고, 마흔의 끝에서, 마흔을 되짚으니,
차갑게 식어가는 일은,
스스로 단단해지는 여정이더이다.
그래서 마흔, 그 즈음에 걸린 남자,
확신 없이 선택한 길이라도 열렬히 걷는 자,
자신을 향한 편견에 분연히 저항하고 싶은 자,
제대로 사는 방법이 드디어 보이기 시작한 자,
골프장, 낚시터, 산 말고도 가고 싶은 곳이 많은 자,
빨강과 보라 사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색깔들을 비로소 깨닫는 자,
시퍼렇게만 삐죽거렸던 날이
마침내 예리하게 반짝이는 자,
지난 날 푸르렀던 꿈이 또렷하게 떠오르는 자,
그 꿈길에 뛰어들면
멋들어지게 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자,
지금이라도 할 수 있다 믿는 자,
이대로 슬프게 식어버릴 수 없는,
여전히 용광로 같은 자.
그래서, 어쩌면, 결국,
숨쉬는 횟수만큼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에 답해야 할 자.
마흔이더이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렵니다.
[1] 한겨레 신문‘이진순의 열림’ 2016년 11월 18일 자, 최현숙 인터뷰 가운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가진 자, 배운 자의 시선을 내면화한다.’를 변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