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도

by 흰머리 짐승


‘그 정도’란 말이 있습니다. ‘그’와 ‘정도’ 사이를 띄어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요. 대개 붙어 다니기 때문이죠. 언뜻 무색 같아 보이지만 다섯 살 제 딸이 스케치북 한 바닥에 쏟아내는 색깔의 수만큼 갖은 의미를 뿜어냅니다. 앞뒤에 어떤 말을 더하느냐, 누가 누구에게 말하느냐,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기분이 어떠하냐, ‘그’와 ‘정도’ 사이 호흡의 길이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속에 품은 뜻이 제각기 다르지요.


‘그 정도’가 보호자의 기대였던 적이 있습니다. “아휴, 그 정도 밖에 못해?”, “공부하는 학생이면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야.”, “내가 돈을 얼마나 들였는데 그 정도 쯤이야 쉽잖아, 안 그래?”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선생님과 부모님이 원하는 바른 길 위에서 “그 정도면 잘 했다.”는 한 마디를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어느 길에 서야 하는지 스스로 살펴 볼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따져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요. 스무 해를 그렇게 기대 뒤에 숨어 살았습니다.


스무 살부터 ‘그 정도’는 스스로 세워본 적 없는 제 삶의 기준들이더군요. 사방에서 날아들었습니다. “에이, 그 학교 다녔으면 못해도 그 정도 직업은 가져야지.”, “이 좁은 땅에 날고 뛰는 놈 천지, 운 좋은 놈 수두룩한데, 그 정도로 어디 승진이나 하겠어?”, “얌마, 누구나 다 그 정도는 힘들어. 엄살 떨지 마.”, 대체 그 자들이 말하는 그 정도란 어디쯤이었을까요? 가뜩이나 땅도 좁은데 일방통행 도로에 밀려 들어 선 듯 했습니다. 아니다 싶어도 돌아 나오기 어려운……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그 정도’는 갑자기 명쾌해졌습니다. 구체화된 숫자, 물체, 형태로 나타나더군요. ‘그 정도’의 돈벌이, ‘그 정도’의 집과 차, ‘그 정도’의 취미, ‘그 정도’의 인맥 따위들…… 그래야 한다기에 열심히 좇았죠. 물론 어느 하나도 ‘그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제게 ‘그 정도’ 너스레를 떨었던 자들은 어느 새 다 도망가고 없더군요.


왜 묻지 않았을까요? 왜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2인용 테이블에 커피 두 잔 놓고 뜨듯하고 우스운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하는데, 왜 똑똑하고 바쁜(척 하는) 자들 술 취한 자리만 쫓아다니면서 소란스런 허세에 익숙해지려 했을까요? 몇 시간이고 한 자리에 앉아 하는 엉뚱한 상상이 좋은데, 왜 자꾸 이 자리, 저 자리 옮겨 다니며 하나마나 한 말들을 흘렸을까요? 아내와 노는 게 제일 재미있는데, 왜 잠든 아내 얼굴만 봐야 했을까요? 그 정도는 해야 했을까요? 정말 그럴까요? 왜 행복하지 않고, ‘행복해지려고’만 했을까요? 왜 이 물음들이 지금에서야 절실한 걸까요? 어찌할 수 없다 쉬이 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어찌할 수 없지 않을 거에요. 그러다 뒤처진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뒤처진다 느끼는 것은 모두 같은 길, 즉 일방통행 도로에 들어섰기 때문일 거에요. 그 자들에게,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을 뿐일 거에요.


성장, 성숙, 노화의 과정에서 강제되는 것 말고, 매일의 만남 속에서도 ‘그 정도’의 의미는 참으로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그 정도 가지고 잘난 척은……”, 질투이기도 하고,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놈이……”, 화풀이일 때도 있어요. 그런가 하면 그저 들어줬으면 싶을 때, “그 정도 갖고 뭘 그러냐”는 껍데기 뿐인 위로나 “내가 옛날에 그 정도는 겪어봐서 다 안다.”는 어설픈 알은체도 심심찮습니다. “그 정도 쯤은 괜찮다.”고 원칙 위에 군림하려 들고,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리 난리냐.”며 순식간에 바보를 만들어버립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너한테 내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냐.”고 순간 사람을 얼려버리질 않나,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치열했던 고민의 시간을 블랙홀로 던져버리는 일도 많지요. 참으로 요술 같은 말입니다. 특별하게 날 선 말도 아니면서 소통을 멈추는 놀라운 능력이 있어요. 그 말, ‘그 정도.’


사십 년 듣고 말해왔으면서도 사람들이 말하는 ‘그 정도’를 제 스스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아울러 제가 사람들에게 내뱉는 ‘그 정도’가 대체 어디쯤인지 자꾸 곱씹어보게 됩니다. 채팅방에 의미 없이 날리는 ‘ㅋ’와 ‘ㅎ’ 만큼 흔하게 듣는 ‘그 정도’가 과연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제가 ‘그 정도’를 말할 때 듣는 자의 의도나 숨은 마음을 제대로 가늠하고나 떠드는지 돌아보려고요. 분명한 점 하나는, 당신에게 그 정도가 제게도 그 정도는 아니란 것입니다.


삼각 플라스크에 물을 끓입니다. 넓은 바닥부터 끓기 시작한 물의 분자들은 점점 좁은 입구를 향하겠죠. 가만히 보면 그 형상은 참으로 치열할 겁니다. 질서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결국 먼저 입구를 빠져나가 흩어진 물 분자들은 묻지 않을까요?

“대체 어떤 새끼가 불 피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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