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이 쯤 올라서니 나만을 위한 시간에 목마릅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시간 쏟아 하고 싶어집니다. 별의별 인간 군상 속에서 눈치 살피느라, 남모르게 분노하느라, 그 가운데 비집고 이만큼이라도 피어나느라 지쳤거든요. 쉼 없이 떠밀리면서도, 뒤 한 번 돌아볼 용기 또한 없이 바쁘게만 산 탓이라 여기겠지요? 그렇게 마흔 해를 매한가지로 살았는데 왜 하필 이 때 즈음일까요? 먹고 살 수 있는 웬만한 조건들을 이제서야 갖추었는데 왜 하필 이 때 스스로를 뒤흔들까요? 남은 삶이 딱 오늘과 같이 흘러가다 끝날 것 같은 불안이 마음 한자리에 똬리를 틀기 시작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미 직장과 가정에서 나는 옴짝달싹조차 못하는 신세인 것 같죠. 게다가 사십 년 가까이 살았으니 해볼 건 다 해봤고, 모르는 것 빼곤 다 안다 싶을 겁니다. 새로울 것은 더 이상 없어 보여요. 거기에 거들어 '중년의 초입'이란 근본 없는 규정은 ‘내 머리는 굳어간다. 몸도 한창 때와 같을 수 없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편리한 근거가 됩니다. 어쩌면 단 하나 남은 나, 스스로에게 회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갈구하는 건 정말 내게 남은 유일한 해방구일까요?
비록 누군가에 의해 철저히 계획된 길이었다 할지라도 스무 해를 배웠습니다. 비록 곁에 남은 자들이 열 손가락이면 충분하다 해도 기억에 남은 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를 봤어도 수천 시간은 봤을테고, 노래방에서 부르거나 혼자 샤워하면서 부른 노래를 이으면 CD 수백 장은 채울 겁니다. 거리에 날아다니는 종이 조각이든 스마트폰 화면이든 그 안에서 읽은 문장만 수만 개는 될 거고요, 보고서, 쪽지, 일기 따위에 쓴 문장 또한 그 반 만큼은 될 걸요, 아마? 설레거나 뜨겁거나 가슴 찢어지는 사랑도 숱하게 나눠봤고, 그 관계들 안에서 웬만한 감정은 다 느껴봤을 거에요. 어디 그 뿐인가요? 생판 몰랐던 사람과 가정이라는 어렵고도 어려운 사회를 이룬 이들도 있겠고, 혹시 눈물, 분노를 삼키며 힘겹고도 힘겹게 깨어버렸을 수도 있지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아이들을 낳아, 먹이고 가르친 시간이 있기도 할 거에요. 누구나 다 하는 거라고요? 사람 사는 일 다 똑같다고요?
아니요, 유일한 내가 빠졌잖아요. 유일한 나 때문에 판에 박힌, 철저히 계산된 것 같은 길이, 비로소 독특한 경험으로 버무려질 수 있다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그 시기에 와 있는게죠. 나에게로의 회귀는 제게 남은 유일한 해방구가 아니라, 마침내, 가져도 되는 자신감입니다. 특별할 것 없는 경험일지라도, 그걸 모두 겪고 여기까지 온, 유일한 나만의 자신감이 위에 얹어지면 그 조합을 멋들어지게 토해낼 나의 시간이 비로소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제 앞에 놓인 현실, 물론 두렵죠. 두렵긴 한데, 그 동안 치열하게 살면서 하나하나 격파해 왔잖아요. 혼자 해결했든, 누구의 도움을 받았든 지금 이렇게 우뚝 서 있잖아요. 지난 일이라 쉬이 잊었을 뿐이죠. 처음 운동화 끈을 묶어야 했을 때, 바구니 가득이었던 유리 구슬을 거의 잃고 반도 남지 않았을 때 세상 가장 두려웠습니다. 가고 싶었던 대학에 모두 떨어졌을 때 세상 끝났다 싶었습니다. 마흔 즈음, 운동화 끝에 코 박고 끙끙거리는 아이들이 어떻게 보이나요? 갈 대학이 없다 우는 조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요? 모두 이겨내고 저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누구보다 적은 돈을 벌어도, 내세울 만한 지위는 갖추지 못했어도 유일한 저는 지금 여기에 우뚝 서 있습니다. 자신 있냐고요? 자신은 있는데, 무섭습니다. 다시 판에 박힌, 계산된 길을 찾아갈까봐…….
역시 판에 박힌 얘기로 맺어야겠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저는 세 가지 종교를 가졌습니다. 초코파이가 하나님이었고 성모였고, 부처님이었죠. 초코파이 많이 준다 하면 미사도 드렸다가, 예배도 봤다가 법회에도 참석했습니다. 그 때 제게 제일 필요했던 건 초코파이였으니까요. 마흔 즈음의 우리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나를 위한 시간이라면 그건 정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내 몸과 머리가 이제야 준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나이에 괜히 헛짓거리 하다 그나마 가진 것도 잃고, 실패할 것이 뻔하다고요? 살면서 언제 성공을 보장받은 적 있었나요, 우리가? 지금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시기라, 가진 것을 지켜야지, 함부로 나서긴 좀 그렇다고요? 어디 제일 중요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던가요, 살면서? 사실 가진 것이 얼마나 되나 따져보니...... 얼마 없죠? 뜻대로 되지는 않겠죠. 늘 살던 대로 살고 있는 오늘 우리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 딱 그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