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새해를 시작하면서.

by 흰머리 짐승

새해 아침,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앞에 놓았습니다. 커피는 아직도 끊지 못한 담배와 같습니다. 효능을 따지면 마실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매일 서너 잔을 마주해요(물론 담배는 그보다, 훨씬, 흠……). 커피는 그저 심심하거나 불안한 시간을 파고들 뿐입니다. 따라서 그토록 마셔대는 커피에 기호라 할 만한 것이 없는 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이십 년 피운 담배 맛도 여태 몰라 아직 잡히는 대로 사 피우는데요, 뭘. 배고프면 우유나 캐러멜, 또는 둘 다 넣은 놈을, 그렇지 않으면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죠. 대개는 큰 걸로 시킵니다. 무료와 불안을 달래기에 작은 컵은 늘 모자라요. 한기가 돌면 뜨거운 커피를, 덥거나 목이 마르면 얼음 가득 채운 걸 마십니다. 배고프면 많이 먹고 그렇지 않으면 대강 때우며, 추우면 온수로 더우면 냉수로 목욕하는 것과 매한가지죠. 기호라 할 것도 없이 몸의 요구에 따를 뿐입니다. 그런데요, 딱 하나 손이 가지 않는 놈이 있습니다.


추운 날 뜨거운 커피를 양껏 시킵니다. 한두 모금 마신 뒤 커피잔을 내려놓고, 파묻힐 것 같은 소파에 앉아 드나드는 사람을 쳐다보거나 미처 마치지 못한 온갖 시답잖은 계획들을 머릿속에서 둥글리기 시작하죠.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내려놓은 커피잔을 들어 올려 입술에 갖다 댑니다. 제가 주문한 뜨거운 커피는 온데간데 없군요. 몇 모금 마시지 않은 뜨거운 커피에 언제부터 김이 수그러들었을까요? 식은 커피는 아까워도 가차없이 버려집니다. 얼음이 모두 녹다 못해 미적지근한 아이스커피는 물처럼 마셔도, 차가워져버린, 한때 뜨거웠던 커피는 마실 수가 없습니다. 둘의 온도가 비슷하다 해도 말이죠.


죽는 날까지 뜨거울 순 없습니다. 서서히 식어가겠죠. 막기 어려울 거에요. 다만 아직 열기가 솟는 제 몸과 여전히 재기발랄한 생각들이 팔딱거리는 저의 정신을 스스로 나서 식혀버리는 바보는 아니기를 바랍니다. 한때 뜨거웠던 커피처럼 개수대에 부어버릴 수는 없겠지만, 아침마다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이 세상 가장 고역일 수도 있으니까요.


새해에요. 아직은 맘껏 솟아 팔딱거려도 될 거에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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