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왜 상쾌하다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단 하루의 아침도 깃털같이 가벼웠던 기억이 없거든요. 열 시에 잠들어 여덟 시 쯤 깨어난 아침조차 무겁기는 마찬가집니다. ‘굿모닝’, ‘상쾌한 아침!’ 따위의 아침 인사 뒤에 붙는 용언은 아마 ‘입니다.’ 가 아니라 ‘바랍니다.’ 아닐까 싶어요. 기분이 좋거나 상쾌하기 어려우니, 부디 그러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인 셈이죠.
힘든 아침을 맞이하는 이유는 한두 가지로 뭉뚱그릴 수는 없을 거에요. 밤 늦도록 퍼부어버린 술 때문일 수도 있고, 윗집 열렬한 부부의 싸움 소리에 잠을 설친 탓일 수도 있을 것이며, 새벽에 갑자기 무섭다고 울며 몇 시간을 버틴 징글맞은 막내 녀석 덕분일 수도 있겠죠. 무거운 아침의 이유를 이렇게 명징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일 거에요. 저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아요. 아파트가 아니라 이웃의 소리가 들리지도 않죠. 딸아이가 새벽에 깨는 일은 있어도 조금만 안고 달래면 다시 잠드는 효녀(?)라 화장실 가는 셈 치면 됩니다.
잠에서 깨면 말이죠.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잔치 치른 뒤 설거지통에 떠다니는 온갖 음식 찌꺼기처럼 오만 가지 생각들이 오물처럼 밀려들어요. ‘나는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내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일까, 믿음직한 남편일까?’ 따위의 인류의 난제부터 ‘집값이 로켓처럼 뛰는데 괜히 팔았나? 이젠 서울 우리 집은 포기해야겠구나. 아이들을 너무 놀리고 있는 걸까? 악기라도 하나, 운동이라도 하나 더 시켜야 하나? 큰 아이 자전거는 언제 가르치지, 작은 아이 한글은 또 언제? 독일어 과외도 시켜야 하는데……’ 와 같은 가족의 난제를 거쳐 ‘부장놈은 오늘 아침 또 석 달 열흘 굶은 개새끼처럼 짖어대겠지? 오늘 쓰려는 글이 인기 없으면 어떡하지? 연락 준다고 한 출판사는 왜 아직도 무소식일까?’ (한 달쯤 전에) 보낸 메시지를 씹어 잡순 그 분은 나를 무시하는 거야, 뭐야 대체? 혹시 내가 말 실수 했나?’와 같은 시답잖은 걱정까지, 당장 끊어버리지 않으면 이십 년 전 모질게 차버린 애인 생각까지 날까 싶어 관 뚜껑 부수고 튀어 오르는 강시처럼 일어나야 합니다. 매일 아침 소용돌이를 돌고 있는 오물의 종류도 참 많고 어느 하나 쉬이 사그라지는 게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아침은 무겁고 무섭습니다.
관 뚜껑 박살 내고 튀어 오른 김에 좀더 나가보기로 합니다. 허리와 어깨를 펴고 거실까지 뛰어 내려갑니다. 왼손에는 어젯밤 계단 앞에 챙겨 놓은 수영 가방이 들려 있습니다. 의지에 억지를 더하여 큰 소리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좋고 상쾌한 아침을 기원한 뒤 다시 계단을 뛰어 내려갑니다. 딱히 목이 마르진 않는데 찬물도 한 컵 들이키죠. 현관을 나서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엑셀러레이터를 천천히 밟아요. 십 분 뒤 수영 레인을 박차고 자맥질을 시작합니다. 서른 바퀴를 쉬지 않고 돕니다. 몇 바퀴째인지에만 집중할 따름입니다. 정말 집중해야 몇 바퀴인지 놓치지 않아요. 샤워를 마치고 다시 자동차에 시동을 걸 때 쯤이면 인류, 가족의 난제, 시답잖은 걱정 따위는 온데간데 없습니다. 설거지통 거름망을 걷어내고 씹다 남은 고깃덩어리, 채소 조각, 양념까지 한 번에 비워낸 기분이죠. 내일 아침에도 분명 오늘만큼의 오물이 소용돌이칠 겁니다. 내일 아침에도 거름망을 들어내야겠죠. 해가 떠오를 즈음이면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딱 하루만, 더도 덜도 말고 다시 잠들기까지 열대여섯 시간만 살아낼 겁니다.
누구는 음악을 듣는답니다. 어떤 작가는 원두를 갈아 커피를 내린다는군요. 제주도 사는 가수는 요가 수련을 한대요. 어떤 사람은 노래 부르면서 거울을 본다나요? 제 아내는 뜨거운 차를 끓여 마십니다. 모르긴 해도 아침은 꽤 많은 사람들에게 상쾌하지만은 않은가 봐요. 그 가운데 또 꽤 많은 사람들이 밝아오는 아침과 함께 궤를 맞추어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짬을 내 꼼지락거리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