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은 그러하다 하고 밤은 어떨까요? 이미 밝혔다시피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이 즈음 남자의 집 밖 밤은 대개 술로 시작되거나, 술로 흥겨워지거나, 술로 끝나므로 술집 간판이 별빛을 가리면 집에 들어오는 편이죠. 밖에 있어봐야 특별히 할 일이 없거니와 어릴 적부터 어두워지면 집에 있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아내가 연인이던 시절, 토요일 저녁 일곱 시쯤 데이트를 끝내고 돌아온 딸에게 장모님이 그러더랍니다. “너희 싸웠니?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와?” 암요, 저는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은 열망을 잠재우고 들여보냈습죠, 그렇고 말고요. 아끼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장인, 장모께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니까요. 저희 집이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집이 막 재밌는 건 더욱 아니에요. 여느 가정과 마찬가지로 화장실에 있을 때조차 엄마, 아빠 불러대는 천둥벌거숭이 둘이 버티고 있죠. 솔직히 이제 별로 놀랍지 않은 딸의 그림, 아들의 동물 강의를 한참 보고 듣고 호응해야 해요. 두 녀석을 침대에 눕히기까지 아내와 저의 동선은 비효율의 끝을 달립니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집에서 쉬는 느낌’이 날 법도 한데, 그럴리가요. 가정을 꾸려가는 두 어른 가운데 하나이자, 학부형, 납세자임과 동시에 막강한 소비자에게는 ‘잠들기 전까지 심심하지 말지어다.’ 하고 던져지는 일들이 늘 있어요. 아무 일도 없는 날엔 기어코 화장실 등이라도 ‘폭’하고 나가줍니다. 회사에 다닐 때도, 아이들을 돌보며 집에 있는 지금도 그런 일들은 꼭 밤늦은 시간 집에서 해치워야 하죠. 헌데 그런 귀찮기만 한 시간은 와, 어찌 그리도 빨리 지나갈까요? 열 시나 되었나봐요. 소파에 앉습니다. 이윽고 제가 그토록 좋아하는 집에서, 바깥이 아닌 안에서 한밤의 모험이 시작됩니다. 그냥 잠들 수는 없죠.
아쉬움과 억울함의 발로입니다. 심한 날은 오늘 하루 한 일들은 모두 의미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보상 받아야죠. 여러 가지에 손을 댑니다. 핸드폰도 만졌다가 텔레비전도 켰다가 먼지 쌓인 책을 뒤적거리기도 합니다. 모험은 무슨! 하는 짓이라곤 그런 것 뿐입니다. 그러다 마지막 만난 날이 언제인지도 가물가물한 페이스북 친구의 성공담에 오늘 하루가 아니라 지난 마흔 해 삶을 후회하기도 하고, 몇 번을 읽어도 문장 구조조차 파악할 수 없는 페이지를 덮으며 총명을 잃어가는 걸 한탄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집을 좋아한다 해도 가끔은 차라리 술이라도 마실 줄 알면 좋겠다 싶은 때도 있죠. 술이라도 마실 줄 알면 이런 텅 빈 밤의 의식 대신 좁아터진 인간 관계라도 다질 수 있으니까요. 몸은 무거운데 잠들지 못합니다. 꾸역꾸역 졸음을 참습니다. ‘잠들 수 없어. 잠들지 않겠어.’ 그래봐야 똑같이 텔레비전을 보고 핸드폰 뒤적이는 게 고작이죠(한밤의 ‘모험’ 대신 ‘소꿉놀이’라 할까봐요.). 결국엔 거실 소파에서 잠들고 맙니다. 그토록 좋아하는 집에서의 밤은 그렇게 하릴없이 흘러갑니다. 하루를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루를 보냈던 방법이 틀렸기 때문도 아닙니다.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은 더욱 아닙니다.
저명한 작가들의 인생사를 재미있어 합니다(혹시나 본이 될 만한 게 있나 싶기도 하고요.). 영화에서나 보듯 별안간 번쩍이는 영감에 사로잡혀 신내린 듯 일필에 써내는 사람들은 못 찾았습니다. 어느 작가는 매일 아침 펜에 잉크를 새로 채우고 잉크창이 빌 때까지 쓰고, 또 다른 작가는 새벽 여섯 시부터 정오까지는 반드시 책상에 앉아 있다는군요. 그렇게 쓰더라도 초고는 늘 보이기 부끄러울 만큼 괴발개발이라 다시 잉크를 채우고 새벽부터 엉덩이 붙이고 앉아 고치고 또 고친답니다. 그토록 미련하게 한가지 일에만 매달리는 셈이죠.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요? 아니요.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는 건 받아들입니다. 이혼 당할 각오를 하지 않은 다음에야 그럴 수 없습니다. 대신 한밤의 모험을 끝낼 수 있을지 모르는 하나의 단서를 발견합니다. ‘한밤의 모험은 제한된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 아닐까? 이미 더할 나위 없을 정도의 많은 일을 하고도 한 치쯤은 더 앞으로 가야할 것 같은 불안 때문은 아닐까?’
과연 제가 한밤의 모험을 멈출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