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관계에 미숙한 편입니다. 가깝게 지내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홉 살 아들이 처음 만난 친구에게 거침없이 장난을 걸 때, 슬며시 물어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그리 쉽게 친구가 되니?” 지난 몇 년 동안 사는 곳이 자주 바뀌다보니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나 어떻게 친구가 될까 고민만 하다 놓쳐버린 사람들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저녁에 집에 초대할까? 함께 밥 먹으면 쉽게 가까워진다는데……’ 오가다 만나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듯 묻죠. 속으론 콩닥거리면서…… “저기, 우리 집에 한 번 올래요? 가족 모두 같이 밥 먹어요.”, “그럴까요? 제가 일정 한 번 보고 괜찮은 날 문자 드릴게요.” 기다립니다. 사흘 째 연락이 없습니다.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합니다. ‘혹시 잊었나? 다시 한 번 물어볼까? 아니야, 아직 할 일들을 정리하지 못한 탓일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다시 기다립니다. 일주일이 넘어가는군요. ‘그래,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자, 조바심 들키지 말고, 할 수 있는 한 가볍고 쿨하게…… 아니야, 실례일지도 몰라. 혹시 가족끼리 만나는 걸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잖아? 아니야, 유럽 사람이니 다시 묻는 것도 괜찮을까? 어떡하지?’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여럿 놓쳤습니다. 흡사 마음에 드는 여자를 앞에 둔 열여섯 소년 같습니다. 가만히 돌이키면 늘 ‘어디까지’를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예의를 갖추면서도 편하게 다가가려면 어디까지 가야 할까? 질척거리지 않으면서도 친한 사람이려면 궁금한 걸 어디까지 물어야 할까? 가깝게 지내도 괜찮을 사람으로 보이려면 나를 어디까지 드러내야 할까?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데 있어 넘어야 하거나 또는 넘지 말아야 할 선(線)을 가늠하는 일은 일상화되어 왔습니다. 막역한 척 굴었다 데인 일, 오히려 지나친 예의를 갖춘 나머지 오래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떠나 보낸 기억, 속에 있는 얘기를 모두 꺼냈다 바보로 전락한 악몽, 완고한 사명감에 파시스트 수괴처럼 장엄한 연설을 늘어놓다 꼰대 취급 받았던 일 따위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관계에 있어 선의 존재는 명확해졌습니다. 다만 어디까지인지는 아직 깨닫지 못했지만요. 사리판단에 있어 쉽사리 미혹되지 않는 시기라는데,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걸 보니 하늘의 분부를 하사 받을 때까지는 기다려봐야 할까요?
어디까지 또는 얼마나, 즉 선의 문제는 비단 사람 사이 관계 뿐만 아니라 삶의 전반에 도사립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불만을 잠재우면서도 훌륭한 고과를 보장받기 위해 회사에 어디까지 충성해야 하는가. 내 맞은편 동료를 앞서기 위해 나는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가. 내 아이를 무엇이든 척척 잘 해내는 아랫집 아이처럼 길러내기 위해 어디까지 개입해야 하는가. 친구의 새 집 만한 아파트를 마련하려면 대체 어디까지 아끼고 모아야 하는가. 맞벌이면서도 집을 모델하우스처럼 정갈하게 꾸미고 사는 이웃 같으려면 얼마나 부지런해야 하는가. 아이 낳고 석 달도 채 되지 않아 결혼 전 몸무게를 쟁취한 친구처럼 되기 위해 얼마나 덜 먹어야 하는가. 아이가 ‘아빠, 엄마 최고!’라 엄지를 치켜들게 하려면 아이들과 얼마나 더 시간을 보내야 하며, 그러하기 위해 회사 눈치는 어디까지 봐야 하는가.
하나둘씩 침투하기 시작한 선의 문제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타래처럼 엉겨 붙습니다. 화나고, 슬프며, 무기력한 나머지 주위 사람 모두에게 미안합니다. 동료, 친구, 아랫집 이웃을 무턱대고 따라해봅니다. 그러는 사이 실뭉치가 풀리기는 커녕 더욱 견고해집니다.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들 모두와 친해질 수 없듯 삶의 모든 국면에서 최적의 선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알고 있죠. 암요, 그럼요. 다만 인정하기 싫을 뿐입니다. 발도 넓을 뿐더러 사업에도 크게 성공했으며 아이들과도 친밀한데다 내세울 만한 취미까지 갖춘 아내 친구의 남편, 남편 친구의 아내는 꼭 있기 마련이거든요.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는 그런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직업의 성공, 가족의 안정, 아이들의 교육, 인간 관계의 풍성함과 깊이 가운데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적절한(아, 모호하여라.) 선을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에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더해 오늘도 하루 스물네 시간을 속절없이 흘려 보냅니다. 무언가 포기하거나 내려놓아야 한다는 답은 알고 있지만, 이 나이 즈음의 삶은 한 과목의 시험지가 아니라 학생부종합전형 같아 자신있게 답을 적어낼 수 없습니다. 대개의 마흔은 그러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