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하는 일은 힘들지 않습니다. 아이들 돌보고 살림하는 일 또한 힘든 일은 아닙니다. 이 두 문장에게 욕 먹이지 않기 위해 사족을 좀 붙이겠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월급이 나오지 않았던 달은 없었어도 열 달 근무하는 동안 두어 달 정도 제 날짜를 훌쩍 넘겨 받았습니다. 구질구질해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어두운 시작이었습니다. 두번째 회사에서는 어림잡아 일주일에 100시간 가까이 일했습니다. 무려 4년을 다녔죠. 몸이 버티지 못했습니다. 다음 직장은 누구나 아는 소위 큰 회사였습니다. 그럭저럭 다닐 만했습니다. 팔방을 빼곡하게 메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제 자리를 찾기는 힘들었지만요. 10년 남짓 회사 생활을 멈추고 2년 가까이 두 아이를 돌보며 살림하고 있습니다. 아직 제 손이 꽤 많이 가야 하는 아이들입니다. 이 정도 경력이면 “당신 다 해 봤어? 해 보고나 그렇게 막 내뱉는 거야?” 소리 듣지는 않겠죠? 지난 십여 년 동안 해낼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시대가 좋아졌나봅니다. 회사에서 하는 웬만한 일은 수십, 수백 억 들인 컴퓨팅 시스템이 알아서 해 줍니다. 제 맡은 소임(所任)은 예리한 밀링머신으로 기막히게 잘라낸 퍼즐 조각에 다름 아니어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판 위에서 위치만 잘 찾아내면 끝나는 소임(少任)입니다. 제 동료의 일과 제 일 사이의 관계, 큰 그림 따위는 저 말고 보는 사람이 따로 있을 겁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스스로 시간 보내는 훈련이 되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놀이 시설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저는 그저 자동차에 시동 걸고 가속 페달을 밟아 데려다 주기만 하면 됩니다. 제 손가락은 스위치 누르기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어지간한 집안일은 저보다 저희 집 살림을 더 잘 아는 미끈한 기계들이 대신해 주죠(얼마 전에 식기세척기라는 걸 처음 써 봤는데, 와…… 와……). 저를 도와 제 시간을 남겨주는 기제(機制)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난 십 년 동안 회사 일, 빨래, 설거지, 청소, 아이들 돌보는 일 말고 다른 일은 해보지 못했습니다. 낮잠을 좋아하지도 술을 찾아 마시지도 않으며 게임을 즐기지도 않죠. 좋은 시대를 살고 있는 저는 가끔 시간이 없다는 생각까지도 합니다. 따져보면 참으로 우습기 그지 없습니다. 시대는 제 할 일을 대신해 주는데 삶은 쉽지 않군요. 제 탓이겠죠? 영민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저의 모자람 때문일 거에요. 거의 모든 체계가 체계화된 세상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 말고 돌아볼 여력이 안 되는 건 순전히 제 탓입니다.
저는 언제나 대체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딘가에서는,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사람이리라 믿고 싶지만 제 배역은 늘 대역이어도 괜찮았습니다. 그러하지 않은 시대가 있었겠냐마는 빈틈없어 근사해보이는 이 시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헤아릴 수도 없이 고쳐 쓴 많고 많은 규칙과 송곳 하나 들어갈 틈도 용납하지 않는 표준화된 업무 처리 절차가 위용을 뿜어냅니다. 거기에 볶음밥에 들어가는 당근 조각만큼 잘게 썰어 놓은 업무 단위, 그 작은 단위마다 티끌같은 실수조차 거부하겠다는 미끈한 자동화의 의지까지 더해갑니다. 말단이든 고위 임원이든 늘 대체재가 즐비하게 준비된 시대라 하루 십수 시간을 아무런 책임도 권한도 없이 지내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금도 세뇌되고 있습니다. 저만 열심히 살면 제주도 밤하늘 별만큼의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고. 기회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당장 죽어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노력하지 않는 저의 탓이라고. 에버랜드에 놀러 간 사람 마냥 여기저기 줄 서지 말고 그냥 제가 좋아하는 일 하나에 일만 시간을 바치라고! 작년 초였을거에요. 전직 정치인, 교수, 학원 강사, 현직 정치인이 차례로 일명 고수’님’을 맡아 스무살 남짓 하수 대학생’들’과 토론하는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님’은 너희들이 몰라서, 해 보지도 않고,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징징댄다 꾸짖고 ‘들’은 대체 뭘, 어떻게 하란 말이냐 받아 칩니다. 나이는 ‘님’에 가깝지만 저는 ‘들’께 경의와 미안함을 표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들도 아닌데 여전히 저는 그 알량한 일들에만 천착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가끔은 무척 궁금해집니다. 지나는 거리는 안전하기 그지 없고, 제게 필요한 모든 것은 지천에 널려 있는데 저는 왜 삶이 팍팍하다 느낄까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건 어찌하여 저와 아내, 아이들 뿐이며 그마저도 벅찰까요?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밤 열한 시 잠들 때까지 손발은 바삐 움직이는데 저는 왜 더욱 바쁘게 움직이지 못하는 저만을 탓할까요? 제가 강퍅한 걸까요, 세상이 이상한 걸까요? 고약한 인간 하나가 사는 이상한 세상으로 해둘까봐요, 그럼. 제 이번 생애는 그렇게 저문다 쳐도 제 아이들마저 그래야 한다면 어쩌죠? 견고해질대로 견고해진 이상한 세상이 스스로 균열 낼 일은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인 없는 동전이 떨어져 있어 줍기만 하면 되는 꿈 같은 얘기 하나 해 볼까요? 제 아이들이 다 자란 세상은 승부 근성(勝負根性, 경기나 경쟁 따위에서 이기고 지는 데에 집착하는 것이 뿌리박힌 성질, 표준국어대사전)보다 아무 꾸밈말 없는 근성(芹誠, 정성을 다하여 바치는 마음, 표준국어대사전)이 미덕인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에게 그런 세상이려면 지금 제가 이렇게만 있을 때는 아닌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