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와 둘이 극장에 갔습니다. 영화 시작하기까지 온통 두고 온 아이 얘기 뿐이었습니다. “언제쯤이나 같이 영화 보러 올 수 있을까, 금방이겠지? “얘는 자동차를 좋아할까, 공룡을 좋아할까?”, “나는 둘 다 안 좋아했는데……”, “보고 싶다. 벌써…… 오늘 저녁은 그냥 집에 가서 먹자.” 그저 껌벅거리거나 뒤틀거나 울어 젖힐 뿐인 아기의 엄마, 아빠는 아기의 지금보다 나중을 그리기 마련입니다. 근사한 저녁을 포기하기로 부부가 합의했을 즈음 광고 하나가 나왔습니다. 여덟 살 쯤 된 아이들과 어른들의 시야각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교통 안전 교육의 필요성을 얘기하는 공익 성격 광고였죠. 열두 살이 되지 않은 아이의 시야는 대개 어른의 절반 조금 넘는 수준이어서 길을 건널 때 오른쪽, 왼쪽을 늘 살피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에 잊지 말고 길 건너는 연습 시켜야겠네.”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 그 큰아이는 아직 열두 살을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이의 아빠는 이미 오래 전에 열두 살까지의 기억을 잊었고요. 열두 살이 없는 두 남자가 도시를 걷습니다. 어린 남자는 연신 고개를 돌리면서 한 번의 시선에 하나의 장면을 봅니다. 카페 야외 의자를 쪼아대는 비둘기,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주문한 무지개색 음료, 그 뒤를 빠르게 지나가는 자전거까지 하나하나에 눈을 돌리고 시간을 들여 바라봅니다. 그 남자의 해찰이 못마땅한 어른 남자는 강력한 손아귀의 힘으로 어린 손을 잡아 끕니다. “가자. 빨리.”
집으로 돌아온 어른 남자는 익숙한 과정에 따라 어린 남자를 씻기고 먹인 뒤 침대에 눕혀야 합니다. 과정의 사이사이 열두 살을 지나지 않은 남자는 창문 밖 정원으로 떨어지는 잎사귀와 읽다 만 책을 쳐다봅니다. 아침에 떨어뜨린 식탁 밑 씨리얼 조각을 보곤 “아빠, 이거 벌레야?” 합니다. 열두 살까지의 기억을 잊은 남자는 그 녹진하고 거무튀튀한 조각을 무심히 주워 변기에 던지고는, “자, 이제 잘 시간이야.”라 말합니다. 동문서답치고 참 냉혹합니다. 어른 남자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옵니다. 어지러이 놓인 연필, 색연필, 지우개, 공책 따위를 휘갑쳐 치웁니다. 어린 남자가 씨리얼 벌레를 발견했을 즈음 쓴 일기가 보입니다.
“아빠와 박물관에 갔다. 어떤 큰 아저씨가 무지개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 비둘기가 무지개 주스를 쳐다봤다. 걔도 나처럼 무지개 주스를 마시고 싶은 것 같았다. 그 때였다. 텐트(어른 남자 주: 야외 카페 천막을 말하는 듯) 뒤에서 빨간색과 검은색이 섞여있는 자전거가 휙 지나갔다. 비둘기는 자전거를 따라갔다. 무지개 주스는 포기했나 보다. 아빠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아팠다. 나도 사달라고 하려고 했는데 아빠가 빨리 걸어가는 바람에 말을 못했다. 다음에 박물관 갈 때는 사달라고 해봐야겠다.”
어른 남자는 어린 남자의 일기를 읽고도 무지개 음료와 비둘기와 빨갛고 검은 자전거를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열두 살까지를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과 같이.
아이의 시야가 좁은 건 창조주(가 있다면)의 깊은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열두 살까지만이라도 제발 지금, 여기, 눈앞을 보라는…… 곁눈질로 흘겨보고 다 본 듯 건방 떠는 나이가 되기 전 잠깐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