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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소개서

by 흰머리 짐승

요즘 저에 대한 글을 몇 편 썼습니다. 손바닥 만한 하드디스크에 틈틈이 모아온 기록과 십수 년 동안 쓴 일기를 살피고 그 기간을 함께 보낸 아내를 인터뷰했죠. 오래 걸렸습니다. 고작 한두 쪽인데 보름도 넘겼나봅니다. 모양도 소재도 제가끔인 블록들을 앞에 두고, 견고하면서도 유려한 집을 쌓아 올리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그 집 안은 어떨까 궁금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서른을 앞두고 자기소개서, 이력서, 프로필 따위를 참 많이도 썼습니다. 설계된 시간 동안 얼마나 성실하게 살았는지 증명하느라 그야말로 욕봤습니다. 조금의 참말과 그보다 많은 거짓말이 뒤섞여 날아다녔습니다. 그 때는 참 뭣도, 멋도 없었습니다. 한 쪽을 채우기도 벅찰 만큼.


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쓸 수 있는 참말들이 넘쳐납니다. 채우는 일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어질러진 자취방에서 한 줄 쓰고 한숨 쉬고, 지웠다 또 한 줄 쓴 뒤 담배 물던 시절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됩니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생각했던 지난 십여 년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니 대단해 보이는 일도 꽤 여러 번 했더군요. 주춧돌부터 서까래까지 잘 받쳐내기만 하면 마룻바닥부터 지붕까지 주욱 쌓아 올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주춧돌과 서까래를 깔기만 하면, 언뜻 보아 드러나지도 않을 그깟 돌덩이와 나무 조각만 있으면……


아, 그게 없는 겁니다. 어떻게든 쌓아 올리긴 하겠는데 과연 이 집채 만한 것이, 과연 한 사람이 살아온 집인지, 수많은 객(客)이 머물다 떠난 여관인지 가늠할 수가 없는 겁니다. 외벽 색을 바꾸고 현관에 작은 창문을 내고 앞마당에 꽃화분 몇 뿌리 가져다 놓아 봤습니다. ‘저’란 집이 꽤 근사해 보이더군요. 이런 걸 긁어 부스럼이라기도 하고 오지랖이라기도 하죠. 자꾸 그깟 돌덩이와 나무 조각, ‘저’란 집을 받치는 주춧돌과 서까래가 아쉬운 겁니다. 남들처럼 살아왔고, 남들 만큼 살고 있으며, 남들 따라 살아갈텐데 이제 와 이런 미련한 생각에 빠져도 될까요?



"내 피는 끓어오르지도, 정열적으로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했다. 나는 비겁하게 모든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고서 할 일을 다했다고 믿고 싶어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235쪽(e-Book 버전),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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