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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요

by 흰머리 짐승

‘공감 능력’ 이라는 말이 자주 들려옵니다. 아내와 마주 앉아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별 뜻 없이 자주 쓰지요. ‘큰아이는 아직 공감 능력이 부족해보이지 않아?’와 같이. 가만있어보자, 공감(共感)과 능력(能力)? 섞어 쓰기에 구성없지 않아요?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기분(주, '공감'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을 과연 능력이라 봐야 할까요? 얼마나 중요하면, 오죽이나 강조하고 싶었으면 그럴까 하고 우선 넘어갑니다. 한편 동시에 비슷한 정도로 빈번히 쓰는 말이 또 하나 떠오릅니다. 각자도생. 혼자 살아내야 하는 서글픔에 자조를 더해 토하듯 내뱉는 말이죠. 공감과 각자도생, 결이 다른 두 말이 우리 시대의 인간 관계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각자도생 시대의 반동(反動)으로써 공감 능력이 움트는 걸까요?


공감이 부각되는 것은 아마 휙휙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의 나를, 나의 정체를 확인하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 때문일 거에요. 어느 집단과 동질성을 느끼느냐에 따라 자신이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인지, 자신 앞에 벌어지는 상황들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따위가 뚜렷해지니까요. 공감 여부는 바쁘다, 정신없다 를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시대에 자신과 무관한 일, 무관한 사람을 매끄럽게 내칠 수 있는 훌륭한 구실의 역할도 합니다. “얘는 나랑 맞는데 쟤는 도무지 안 맞아.”


누군가의 경험, 이야기에의 공감은 또한 내 삶이 아직은 안전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어요. 동시대를 통과하는, 생각과 느낌이 비슷한 집단의 존재는 스스로가 사회로부터 완전히 버려지거나 격리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의 토양이죠. 그러고 보니 공감은 반동이 아니라 도생하는 각자가 서글픔을 달래는 방편이었군요. “아직은 괜찮아”


여기까지 보면 함께 살아가야하는 동일 종(種)의 입장에서 공감은 문제 삼을 필요 없는 자연스러운 성정으로 보입니다. 그럴까요? 문제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공감에 능력이라는 과부족의 개념까지 붙여가며) 공감하기를 강요하는 데 있습니다.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좋은 것, 공감 되지 않는 것은 나쁜 것, 공감할 수 있는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이며 나머지는 버려져야 할 것, 결국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내 편, 나머지는 적이 되어 버리는, 공감 여부에 따른 편가르기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얼마 전 조남주 작가의 소설이 원작인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관람평이 젠더 대결로 변질된 일이 있습니다. "괜히 엄살 떨지 마" vs "영화나 보고 악플 달아!"


‘나는 싫다. 나는 아니다’라고 말해본 지 얼마나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방금 당신이 좋다고 말한 것을(에) 싫어한다(동의하지 않는다)’고 마지막으로 용기내어본 것이 언제인지 가물거립니다. 마흔 전후, 누구에게나 이유 모를 위기가 옵니다. 누구에게는 환절기 감기처럼 지나간다지만 알게 모르게 많은 이들이 자신의 기호, 존재의 가치, 방향 들에 대한 질문들을 한꺼번에 쏟아내요. ‘그래요, 나도 그래요’하며 받았던 위로와 안도감이 ‘그럴까, 나도 정말 그럴까’의 물음으로 돌변하는 순간 어찌해야 할 지 모르고 끝 간 데 없는 우물 속으로 빠져들죠. 헤어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더군요. 나의 정체성은 단 한 번도 나로부터 출발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질감을 느끼는(또는 느껴야 한다고 여겨온) 집단에 기대어 나의 감정을 과장했고 헷갈리는 생각을 무정하게 재단해왔음을 마흔 즈음의 사춘기에 와서야 깨닫게 됩니다. 공감 집단이라는 그 신기루같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날까 싶어 스스로의 내면으로부터 솟아나는 이야기들을 누르고 눌러왔던 게죠.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좋아요’를 찍듯 ‘그래요, 나도 그래요’를 반복해온 탓에 ‘가만있어 봐요. 나는 달라요, 나는 동의하지 않아요, 나는 싫어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동의하지 않는다, 다르다, 싫다 들이 저를 ‘송두리째’ 정의하거나 격리시키는 마법의 주문은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82년생 지영과 지영의 남편 대현의 감정선에는 동의하지 못해도 조남주 작가의 다음 소설 ‘사하맨션’의 사하들의 처절함은 저릿했습니다. 어머니가 살아있는 남편, 제 앞가림이 아직 서툰 어린 아이와 함께 사는 82년생 한국 여자는 하나같이 김지영의 삶에 공감해야 할까요? 실은 이 질문을 몇 번이나 지웠다 결국 썼습니다. 제가 남자인 탓에 ‘영화나 보고 그런 말 하세요’, ‘그 처지 되어봤어요?’ 의 젠더 프레임으로 보일까봐 무서웠거든요. 영화가 끝난 뒤 함께 본 82년생에게 물었어요. ‘어땠어요?’ 그 82년생, 시부모가 살아있는 남편, 제 앞가림 못하는 아이 둘과 함께 사는 한국 여자의 대답은 아리송했습니다. “내 인생이 정말 저런 거였어?” 그 여자는 과연 인제야 각성한 걸까요? 저는 역시 영화를 보지도 않고 별점 하나 주는 자들과 다를 바 없는 꼰대일 뿐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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