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에게 왜 그것을, 그 행위를, 그 사람을 좋아하는지 물으면 대답은 대개 군색하기 마련입니다. 누가 제게 책을 왜 좋아하는가,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 묻는다면 저는 잠시 망설이다 ‘그냥 뭐’라 얼버무릴 겁니다. 책을 읽고 나면 삶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저는 모릅니다. 율라 비스, ‘면역에 관하여’를 읽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새로운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한 때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인간 면역의 힘, 체계 들에 대해 지식이 생겨 아이들을 갖가지 질병으로부터 더욱 안전하게 보살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따위 하지 않아요. 오히려 인간 사고의 불완전함에 대한 작가의 문장들을 읽는 재미가 더 큽니다. 예컨대,
“독성학자들은 ‘용량이 독을 결정한다’고 본다. 어떤 물질이든 과잉으로 쓰이면 독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은 아주 많은 용량일 때는 인체에 치명적이라, 2002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주자가 수분 과잉으로 죽은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을 용량과는 무관하게 안전한 것 아니면 위험한 것으로 생각한다.” 48쪽, 오염에 대한 두려움
책 읽을 시간이 없다, 책읽기는 어렵다고 하는 이들을 저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푸념 속에는 ’책은 꼭 읽어야 하는 것’이란 강박이 숨어있다 생각하며, 저는 그 강박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책은 꼭 읽어야 한다 생각하지도, 한번 편 책은 반드시 끝까지 읽어야 한다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면역에 관하여’를 즐겁게 읽고 있지만 끝까지 다 읽을 수 있는지는 마지막장에 가봐야 알 겁니다. 책을 읽는 것이나 팟캐스트를 듣는 것이나 유튜브를 보는 것 사이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책읽기는 고도의 사고(思考) 행위이므로 필요하다는 말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몇몇 대가(大家)들이 썼다는 경영서, 몇몇 교수’님’들께서 번역했다는 외국 소설 들은 별다른 사고 행위 없이 덮어버려도 될 정도입니다. 실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 따뜻한 거실 소파에 앉아 책 읽다가 꾸벅꾸벅 조는 주말 오후입니다. 소파에 앉기 전부터 아예 눈을 감을 작정을 하고 책을 집어드는 셈이죠. 책읽기를 생각 훈련이라 여기는 순간 모든 책은 병풍같은 책장에 꽂혀 있는 두꺼운 양장본이 되고 맙니다.
소설을 가장 많이 읽습니다만, 또한 읽다가 가장 자주 중단하는 장르 또한 소설입니다. 물론 수효가 아니라 비중이 그러하다는 겁니다. 반면 역사책은 소설에 비해 읽는 빈도가 월등히 낮으나 끝까지 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장르는 소설일까요, 사서(史書)일까요? ‘톰소여의 모험’, ‘허클베리핀의 모험’은 몇 번이나 읽었지만 미국을 무대로 한 방랑기로 치자면 비슷한 ‘길 위에서’는 작가의 집필 기간보다 더 긴 시간을 잡고 있었고 아내가 “자기 좋아할 거야”하며 권한 ‘황금방울새’는 과감하게 덮었습니다. 저는 모험 소설 타입일까요, 아닐까요? 광활한 영토를 무대로 펼쳐지는 미국식 모험기를 좋아하는 걸까요, 지루해하는 걸까요?
위화, 파트리크 쥐스킨트, 김훈이 쓴 소설은 빠짐없이 챙겨 읽었지만 줄거리는커녕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대표 작품 말고는 제목조차 가물가물합니다. 자주 듣는 팟캐스트가 있습니다. 저자를 초대해 책을 소개하는 것이지요. 두 명의 진행자 가운데 한 사람은 방송 주제가 아닌 책의 주제, 인물, 심지어 어느 장면까지 정확하게 그려냅니다. 제게 책읽기는 그저 시간 죽이기일 뿐일까요?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 아내가 영화 볼래, 책 볼래 하면 영화를 본다 할 겁니다. 책읽기를 좋아한다 해 놓고 실은 영화를 더 좋아했던 걸까요?
여전히 책을 읽습니다. 책읽기는 빼놓을 수 없는 일과 가운데 하나입니다. 다만 읽고 기억하는 ‘용량’으로 보자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과 독서광 사이 어딘가에 있습니다. 율라 비스의 일갈과 같이 정확히 둘로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책읽기에 관한 한 저는 어느 쪽에 속할까요? 에이, 아무려면 어때요. 오늘 해야 할 글쓰기도 다 했으니 소파에 앉아 좀 졸아야겠습니다. 읽다 졸기 좋은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곰브리치 세계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