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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머리 짐승 Mar 27. 2020

일어날 수 있는 일

COVID19-4

사랑할 땐 모든 로맨틱 코미디는 제 이야기였고, 그 사랑이 끝나는 순간 모든 이별 노래가 제 마음과 같았지만,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슬픔과 좌절, 불행 가운데 피어나는 가족애를 그린 영화나 드라마는 오히려 피하게 됩니다. 세상 모든 사고, 범죄, 재해, 전염병 확산의 한가운데 아내와 아이들을 놓고 자꾸 상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끔찍한 상상들이 날개를 달고 망상의 단계로 들어서다 결국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인식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사상 유례 없이 빠르고 폭넓은 창궐 양상을 보이는 COVID19로 말미암아 세계는 이제 지금을 넘어 그 이후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기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가운데 으뜸은 ‘과연 이번으로 끝날 것인가’인 듯 보입니다. 또한 그 질문의 답을 대개는 알고 있습니다. ‘계속될 것이며 더 자주 올 것이고 더 강력해질 것이다’ 이는 세균, 바이러스, 곰팡이, 원생동물(세포 하나가 곧 생명체의 단위가 되는 동물, 아메바, 편모충 따위가 있습니다) 따위와 같이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를 향해 인간 스스로 돌격하는 일을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유주의로 날개를 단 자본주의, 자유 시장 경제를 당연한 섭리로 받아들이는 한 말이죠.


자본주의, 자유 시장 경제는 깊고 거대한 담론을 품은 개념이 아닙니다. 자본주의를 정의하는 단 하나의 정의 따위는 없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욕망을 그럴 듯하게 이데올로기화한 것에 다름 아닙니다. 물론 자본주의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예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사람들은 스스로의 욕망을 연료 삼아 적당히 포장한 채 살아갈 겁니다. 저 또한 그렇고요. 한데 엉뚱하게도 살아있는 생명이라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는 바이러스라는 것이 자본주의, 자유 시장 경제에 다시 말해 인간의 끝없는 욕망에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성장을 전제합니다. 각 나라의 국책 은행, 금융 감독국, 경제 연구 기관 따위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경제 성장률을 전망하는 것입니다. 합의된 전망치에 따라 정부는 한 해의 재정 운용 계획과 무역 수지 계획을 세우고, 기업은 투자, 비용 투입, 생산량 규모 들을 결정하죠. 그 숫자 하나에 주가가 요동치는가 하면 집값이 너울집니다. 바로 그 성장률을 0 또는 음수로 만들지 않는 것, 즉 끊임없이 자라는 것, 팽창하는 것이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생존 방식입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무한히 자라는 무언가를 정작 우리는 각자의 삶 속에서도, 역사의 과정에서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세계 경제는 영원한 성장이라는 허상에 기대고 있는 셈입니다. 한편, 자본주의 번영의 전제가 성장이라면 지속 성장의 전제는 경쟁에서의 승리입니다. 인간이 부쳐 먹을 수 있는 땅이 유한하기 때문이죠. 쉽게 말해 땅따먹기란 말입니다. 자본주의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하던 시점 사람들은 이웃과 경쟁하면서 자라왔습니다. 나의 이웃이 베 짜는 기계 한 대를 들여놓으면 나는 두 대를 사옴으로써 그이보다 더 많이 더 빨리 동네 양장점 고객들을 확보했죠. 결국 방직기 한 대 가진 내 이웃의 방직 공장은 ‘더 자라지 못해’ 흔적도 없이 죽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이웃 동네 직물 업자가 우리 동네에 나타났습니다. 동네를 접수한 나는 이웃 동네 업자를 이기기 위해 다시 자라야만 했습니다. 공장을 짓고 생산량을 늘려 단가를 낮춤으로써 겨우 침입자를 막아냈는데 이번에는 배를 타고 저 먼 나라 사람들이 동네를 휘젓고 다닙니다. 나는 문득 깨닫게 됩니다. ‘자라지 않으면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죽는 것이구나. 그래서 옆집, 윗동네, 가 본 적 없는 먼나라를 밟고 일어서야 하는구나’


자라기만 할 뿐인 멈출 줄 모르는 생산업자와 무역업자들이 끊임없이 세상에 토해내는 물자들을 소비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던 차 사람 살리는 의학의 발달과 각국 정부의 출산 장려 정책으로 인구 증가 속도는 가팔라졌죠. 1804년 약 10억 명이었던 세계 인구는 123년 뒤인 1927년에 가서야 20억 명에 도달합니다. 다시 10억 명이 늘어나는 데는 33년 밖에 걸리지 않았고 그로부터 고작 14년 뒤인 1974년 세계 인구는 40억 명에 이르렀습니다. 123년 걸렸던 두 배에 이르는 기간이 무려 절반 미만, 즉 47년으로 단축된 겁니다.[1] 필요한 공간이 빠른 속도로 늘어갔죠. 머무를 집과 그 많은 사람들이 어울릴 수 있는 시설을 더 많이, 더 빨리 마련해야 했습니다. 빠른 인구 증가와 그에 따른 공간의 고갈, 그 자체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닙니다. 일견 인간 또한 하나의 종이라 여길 때이는 본능과도 같은 자연스러운 번영으로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진정 옳고 그름을 따져 볼 겨를조차 없었던 질주는 따로 있었는데, 바로 폭발하는 인구와 자본주의 욕망의 결합입니다. 사람들은 무난한 삶을 위한 진짜 필요를 훌쩍 뛰어 넘는 욕심마저 ‘필요’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옆집 사람이 새로 산 빠르고 튼튼한 자동차, 친구가 이사한 넓은 집, TV 광고에 나오는 환상의 섬, 그 섬에서만 맛볼 수 있는 산해진미 따위가 내 삶에 있어 반드시 있어야 하거나 추구해야 하는 것들이 되어 간 겁니다. 사람들은 더 멀리 닿아야 했고, 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싶어 했으며, 더 새롭고 다채로운 경험을 필요로 했습니다. 자본주의는 그 필요들을 즉각 성실히 채워 줬어요.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시대가 된 지 좀 되었을 때였으니까요. 유한한 지구 위 인류는 무한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무한한 경험을 꿈꾸었던 것이지요. 결국 사람들은 미지의 땅으로 쳐들어 가 높은 울타리를 치고 땅 주인 행세를 하기에 이릅니다. 한 치도 떨어지지 않은 울타리 바깥에는 원래 주인이었던 동식물들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리둥절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안전 거리를 유지하며 각자 살고 있던 인간과 인간 아닌 생물들 사이 바리케이드가 사라진 셈이죠. 생존의 터전을 잃은 동식물들은 하나둘씩 스러지기 시작합니다. 인간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종(種)의 운명을 다하게 되죠. 그저 무분별한 벌목, 개발 따위 현상 차원을 넘어 인간의 끝 간 데 없는 욕망이 자본주의 체제를 연료로 불놀이를 해 온 겁니다. 


억겁 세월 동안 울타리 밖 동식물과 아무 문제 없이 공생해 온 바이러스라는 단백질 덩어리는 불놀이가 휩쓸고 지나간 곳에서는 존재를 이어가기 어려웠습니다. 새로운 둥지가 필요했던 것이죠. 복제 능력만 가지고 있을 뿐인 바이러스가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숙주로 수십 억 개체의 인간을 선택한 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는 얼마 전 국민일보와의 인터뷰[2]에서 “인간은 바이러스에게 블루오션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무릎을 치며 동의할 수 밖에 없었어요. 바이러스는 그 자체로 흉측하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만큼 사람을 고귀하다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저 많으니까, 가까워졌으니까 인간 몸 속에 둥지를 튼 것이고, 계속 살아가기 위해 변이에 변이를 거치는 것입니다. 인간과 동식물 사이에서 그랬듯 인간과 바이러스 사이 바리케이드 또한 함께 사라졌습니다. 물론 인류에 널리 퍼져 치명상을 입혔던 바이러스 가운데 지금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있긴 합니다. 1979년 세계보건기구 WHO가 종식을 선언한 천연두 바이러스가 그 가운데 하나인데, (안타깝게도) 천연두 바이러스는 동물에게서 옮겨온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에게만 있었던 것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인간이 계속해서 불필요한 욕망을 필요로 착각할 때, 자본주의를 계율처럼 모시는 모든 집단들이 개선 장군처럼 침범했던 땅에서 물러나지 않을 때, 오직 인간에게만 무시무시한 바이러스는 더 많이, 더 자주, 더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찾아올 겁니다.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이 반쯤 가려져 코 앞의 친구도 못 알아볼테고, 집에서 나오지 못하는 날들이 점점 늘어날 겁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인간 뿐만 아니라 수억 종의 동식물이 함께 사는 조화로운 지구를 위해 욕심을 버리고 안분지족의 삶을 살자는 구호는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긴 한데 혹시 이러한 구호에 수긍할 수 없거나 너무 먼 이야기처럼 들린다면, 여전히 인간의 욕망은 결코 덜어낼 수 없는 성정이라 여긴다면, 당장 올해 말 COVID20 (COrona VIrus Disease 2020)의 창궐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나마 가장 기본이 되는 필요조차 충족하지 못할 상황이 다시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지금 활보하는 땅 위에서 한 발짝만 물러서자고 호소하고 싶습니다. 조금만 물러서 다시 인간계와 동식물계, (혹시 있다면) 바이러스계 사이 경계를 복원하는 게 어떻겠냐 묻고 싶습니다. 


거의 집안에만 머무른 지 보름이 지났습니다. 이것저것 사러 다니느라, 여기저기 무언가를 하러 다니느라 바빴던 시간들이 언제였나 싶습니다. 냉장고에는 오늘 먹을 식재료만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 잘 먹고 산다는 느낌이 듭니다. 통장 잔고 줄어드는 속도가 느려졌는데도 부족한 것은 없어 보입니다. 제 아이들이 새 게임이나 새 장난감 없이도 잘 노는 아이들이란 사실도 깨달았고, 오래된 노트북 컴퓨터와 3년 전 서울에서 가지고 온 오래된 책들만으로도 저는 충분히 하루를 채울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제게 그렇게 많은 공간과 그렇게 많은 물건과 그토록 다양한 경험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알아가고 있습니다.


          

[1] United Nations, ‘Population prospects’: 1998 edition


[2] http://m.kmib.co.kr/view.asp?arcid=0014365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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