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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머리 짐승 Apr 03. 2020

파뿌리를 물에 담그다

아내는 집에서 일하고, 아이들은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듣는 요즘, ‘식구(食口)’의 본디 역할에 성실한 이씨들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 뭐 먹지?’를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떡국 끓이려고 쪽파를 한 단 사왔습니다. 아이들이 뿌리 근처 흰 줄기는 잘 먹지 않는 탓에 푸른 잎만 쓰고 딸기잼 병에 뿌리를 담가 놨더니 잎이 자랍니다. 다만 며칠 동안 자란 길이가 제각각이군요. 빨리 자라고 싶은 녀석, 그렇지 않은 녀석이 있나 봅니다.


아이들 학교를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반 년 가까이의 고민 끝에 나온 문장이 스무 자도 되지 않는군요. 독일에 온 이래 1년 반 동안 아이들은 국제 학교에 다녔습니다. 아이들을 국제 학교에 보낸 건 런던서 익힌 영어를 잊지 않게 해야겠다는 구실이기도 했고(아, 그 놈의 영어!), 무엇보다 이민이 아닌 회사 발령으로 온 가족들은 대개 그러했기 때문이기도 했죠. 돌이켜보면 숨은 이유는 달랐을 지도 모릅니다. 아내와 저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독일어를 할 줄 모르는 부모가 아이들을 독일 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는지 모른다는 뜻이고, 선생님이 우리 아이들을 예뻐하는지 혹 차별하는지 간파하기 어렵다는 뜻이며, 아이들이 혹 씩씩거리거나 울면서 들어와도 선생님과 아이 친구 부모에게 따져 물을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독일은 아직 교사의 권위가 살아 있어 초등학교 4학년(독일 초등학교는 4년제입니다)이 되면 대개 선생님의 추천에 따라 어떤 상급 학교로 진학할 지 결정됩니다. 대학 갈 교육을 받을 지, 일찌감치 직업 교육을 시작할 지에 대해 초등학교 4학년, 그 어린 나이에 결정해야 하죠. 물론 독일 내에서도 이러한 조기 진로 결정에 대한 논란은 지속되어 왔지만 아직 학제를 바꿀 의지는 없어 보입니다(이 밖에도 독일 교육에 대한 논란은 더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쓸게요). 감긴 눈과 닫힌 귀로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해야 할 지 모른다는 공포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올해 가을이 되면 집 앞에 있는 독일 초등학교로 전학합니다. 아이들에게 동네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집 근처 골목과 숲을 뛰어다니면서 ‘우리 동네’의 기억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다니는 국제 학교에는 제 나라로 돌아갈 계획을 가진 아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사는 곳도 넓게 퍼져 있어 학교에서 돌아오면 부모들 사이 따로 약속을 잡지 않는 한 친구들과 놀기도 녹록지 않죠. 나중에 아이들이 이 시기를 떠올릴 때, 엄마 회사 때문에 살던 곳, 아빠 차 타고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 다니던 곳으로만 기억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열 살, 일곱 살이 둥둥 떠 다니는 홀씨의 시기가 아니라 딸기잼 병 꼭대기를 넘어 푸른 줄기와 잎을 밀어 올리는 뿌리의 시기이기를 바랍니다. 독일 학교로 옮기는 이유입니다. 


아이들을 완전히 믿지는 않기로 했습니다. ‘믿고 지켜보자’는 마음이 지금의 저에게는 진짜 믿음이 아니라 믿는 척에 불과한 회피이기 때문입니다. 깜깜이 무서움증을 이겨내기 위해 저는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겨우 두 번 학원 수업에만 의존하던 독일어 공부를 매일 합니다. 전화할 때, 상점에서, 이웃들에게 독일어로 더듬거립니다. 물론 열 번에 다섯 번은 대답이 영어로 돌아옵니다. 공짜 온라인 강의지만 교육학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독일 학제에 대해서도 틈틈이 묻고 찾아봅니다. 올 가을 아이들이 독일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 바짓바람도 일으켜볼까 합니다. 


누군가 제게 “당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라고 속삭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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